민주주의 회복 출구는 민생과 결합한 ‘강력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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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정치, 어디로 가야 하나] 세계는 지금 양극단과 전쟁 中

● 정치적 경쟁, ‘우리(us) 대 그 집단(them)’ 전투로 변모
● ‘타협의 기술’ 발휘해야 할 정치, ‘부족 전쟁’ 양상
● 청년세대, “복지 의존”보다 “기회 공정” 더 원해
● 이념 장벽 허문 글로벌라이제이션, 각국 정치 극단화 부추겨
● 유행처럼 세계 각국으로 번지는 ‘트럼피즘식 포퓰리즘’
● 신우파, 민생 정치로 대중 불만 흡수하며 새 정치 모델 등장


9월 10일 미국 유타주 오렘에 있는 유타 밸리 대학교에서 찰리 커크가 연설하고 있다. 행사 도중 커크는 타일러 로빈슨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뉴시스
전 세계가 극단의 정치에 몸살을 앓고 있다. 9월 초 미국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은 극단의 정치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청년 우파 활동가인 찰리 커크가 미국 유타주의 유타밸리대 강연장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 범인은 22세 청년 타일러 로빈슨으로, 체포 후 수사 과정에서 커크의 보수적 신념에 대한 경멸이 범행 동기로 드러나고 있다.

커크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사회가 얼마나 쉽게 분열과 낙인, 폭력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는지 드러냈다는 점에서다. 합의와 토론 대신 조롱과 혐오가, 정치적 경쟁 대신 제거와 배제가 민주주의 언어를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풍경은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정치는 더는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부족 전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극좌·극우 종언과 포퓰리즘 좌·우 등장
20세기까지 극단의 정치는 비교적 명확했다. 극우는 파시즘, 나치즘처럼 군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내세웠다. 극좌는 공산혁명과 계급투쟁을 전면에 내걸었다. 두 흐름 모두 국가와 이념이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 도식은 설득력을 잃었다. 전차를 앞세운 침략주의도, 볼셰비키혁명을 외치는 계급 봉기도 더는 없다. 대신 오늘날 정치적 극단은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고 있다.

포퓰리즘 좌파는 더는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복지 확대, 기본소득, 기후정의 같은 ‘생활 의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우파도 다르지 않다. 과거 보수주의가 법률가·언론인 등 기득권 엘리트의 권위를 앞세웠다면, 오늘날 우파는 오히려 대중주의적이다. 이들의 무기는 국가주의적 권위가 아니라, “세금을 줄여라” “규제를 풀어라” “우리 일자리를 지켜라”라는 생활 밀착형 언어다.

좌우가 다르다고 하지만 실은 닮았다. 생존과 정체성을 매개로 대중을 동원하는 ‘생계형 카르텔’ 혹은 ‘팬덤 정치’적 성격을 띤다. 정치 무대가 ‘정당 대 정당’의 대결이 아니라, ‘우리 집단(us) 대 그 집단(them)’의 파편화된 전투로 변모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교조적 다원주의’가 오히려 전통적 가치 복권의 필요성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가치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교리가 사회 전반에 강요되자, 피로감을 느낀 시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다원주의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검열과 규율로 작동하자 “이제 그만”을 외치며 과거의 단순하고 확고한 질서를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은 그 전형적 사례다. 좌파 정부가 여성부(현 평등부)를 앞세워 성평등정책과 성인지 교육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사회 곳곳에서 반발이 거셌다. 가톨릭 문화의 뿌리가 깊은 스페인 사회에서 과도한 젠더 행정은 오히려 가족과 전통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 심리를 자극했다. 한국에서 여성가족부 존폐 논란이 정치적 분열의 축으로 떠오른 것과 궤를 같이한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젠더·인종·이민 문제를 둘러싼 좌파의 교조적 담론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정상적 상식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일론 머스크는 더 상징적이다. 그는 미성년 아들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가족을 떠난 경험을 계기로 좌파의 문화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우파적 스탠스를 분명히 했다. 세계적 테크기업 CEO가 좌파적 ‘다양성 교리’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자, 대중 불만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이 반발은 단순한 문화 전쟁이 아니다. 법조·언론·학계·NGO 같은 전통적 엘리트가 ‘진보적 가치’를 독점적으로 정의하고 대중에게 강요하는 구조 자체에 대한 분노다.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새로운 규제와 도덕적 압박은 사실상 또 다른 특권으로 읽혔다. 그 결과 교조적 다원주의가 낳은 아이러니는 바로 ‘전통적 가치의 귀환’이었다.

청년세대는 점점 더 ‘복지 의존’보다 ‘기회의 공정’을 원한다. 스웨덴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복지국가의 상징으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높은 세금과 치솟는 집값, 이민자 복지 쏠림에 대한 불만으로 청년층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2023년 기준 7만3000명이 스웨덴을 떠났는데, 주된 이유는 “내가 낸 세금이 나의 미래가 아니라 난민 복지로 흘러간다”는 불신이었다. 여기에 2018년 이후 유럽 최고 수준으로 기록된 갱단 범죄와 치안 불안이 겹치면서 청년층은 오히려 질서 강화와 공정 경쟁을 요구하게 됐다.

상속세 폐지는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스웨덴은 2005년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해 기업 유치와 성장에 방점을 찍었다. 당시 상속세 부담 때문에 이케아 같은 대표 기업들이 본사를 해외로 옮기던 상황에서 정부는 결국 ‘성장이 곧 복지’라는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당 지형에도 반영됐다. 스웨덴민주당(SD)은 원래 극우 이미지의 소수 정당이었다. 그러다 20~30대 남성을 중심으로 급부상해 2022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올라섰다. SD는 과거의 반이민·반EU 일변도에서 벗어나 청년층의 주거·일자리·안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지금은 온건당과 함께 우파 연정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핀란드에서는 국민연합당(Kokoomus)이 고용·혁신·기회의 공정성을 앞세워 2023년 총선에서 젊은 층의 표심을 크게 흡수했다. 노르웨이의 우파당(Høyre)과 진보당(Fremskrittspartiet) 역시 낮은 세율, 스타트업 지원, 사회규범 강화 같은 현실적 의제를 통해 청년 지지세를 확장했다. 결국 북유럽의 신우파는 “공정·질서·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전통 사회민주주의 복지 담론을 대체하고 있다. 청년세대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이 나눠주기’가 아니라, ‘실력에 따른 보상과 안전한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기회의 사다리’인 것이다.

스트롱맨의 유혹 - 혼돈에서 질서를 향해
정체성 갈등, 포퓰리즘, 정치 불신이 누적되는 사이, 북·중·러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는 군사·외교 전선에서 오히려 ‘질서의 역설’을 과시했다. 혼돈의 민주주의와 정비된 권위주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자, 시민들은 “국익·국가우선”이라는 간명한 언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내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바로 그 욕구를 압축한 구호였다. 자국민의 민생을 최우선에 두는 강한 국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단호한 리더십-결국 ‘스트롱맨’에 대한 갈망이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강권적 리더십을 정당화하는 토양으로 변한다.

2025년 9월 현재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국가 마비 운동’은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릴 때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긴축재정안에 분노한 시민들이 도로와 철도를 막고, 주요 도시가 봉쇄되며, 국채금리가 폭등하고 내각이 붕괴하는 모습은 단순한 정책 반발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광장이 질서를 대신 장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18년 ‘노란조끼’ 시위가 불평등과 엘리트 불신의 분출이었다면, 이번에는 민주주의제도 자체가 대표성과 효력을 잃었다는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런 혼돈은 결국 시민들의 마음을 ‘더 많은 토론’이 아니라 ‘더 강한 질서’로 향하게 한다. “민주주의는 분열만 낳는다”는 회의론 속에서, 국익·질서·통합을 단호하게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귀환할 공간이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제도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수록, 시민은 더 강력한 리더십과 신속한 결정을 요구하게 된다. 방종과 위선으로 무너진 중도좌파 정치의 공백은 ‘질서와 국익’을 외치는 스트롱맨이 메울 공산이 크다. 세계화가 불러온 불평등, 정체성 갈등, 치안 불안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더 많은 합의’가 아니라, ‘더 강한 질서’를 원하는 것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국경을 허물고 신냉전의 이념 장벽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오히려 각국 내부 정치의 극단화였다. 자유무역과 개방은 세계화를 촉진했으나, 동시에 청년과 서민에게 불평등과 불안정의 그림자를 남겼다. 그 결과 각국의 국내 정치 무대는 친미·친중 세력의 각축장이 됐고, 극단적 진영 대립이 일상화됐다.

트럼프의 후광 속에서 나이젤 패라지의 영국 개혁당,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폴란드의 카롤 나브로츠키,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정치세력이 부상했다. 이들은 ‘국익 우선’과 강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우며 트럼피즘식 포퓰리즘을 재현했다.

트럼프는 관세 협상이나 방위비 문제 등을 지랫대로 삼아 여러 경로로 직접적으로 여러 나라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반면 베네수엘라는 대선 부정 논란과 국제 제재 속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며 극좌적 혼돈을 드러냈고, 좌파가 집권했던 네팔은 청년 주도의 시위가 친중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며 국내 분열상이 극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언더도그의 ‘민생 우선’ 정치
과거 군국주의적 극우와 다른 성격의 신우파의 등장은 기술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기반한다. AI와 디지털 플랫폼이 전통적 지식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판사·학자·언론인 같은 전문가의 목소리는 오만으로 읽히고, 오히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자영업자·블루칼라·농민의 목소리가 진정성을 얻었다. 대중은 “규제를 풀어라” “일자리를 지켜라” “기업가정신을 살려라”는 생활 밀착형 구호에 더 크게 반응했고, 신우파의 메시지는 전쟁이나 국가주의가 아니라 청년세대의 공정·안전·미래를 담보하는 민생의 언어로 전환됐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 자리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은 기존 레거시 미디어 권위를 약화하는 동시에, 대안 서사와 음모론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통로가 됐다.

2021년 미국 의회 난입 사태는 대표적 장면이었다. “선거가 도둑맞았다”는 구호는 민주주의제도의 심장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선동이라기보다 제도적 신뢰가 붕괴된 상황에서 분출된 집단적 불만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이러한 분노를 반(反)PC주의, 제조업 부활, 반세계화 구호와 결합해 정치적 지지기반을 공고히 했고, 그 결과 부정선거 담론은 일종의 ‘언더도그 서사’로 기능하며 우파 대중정치의 동원 자원으로 작용했다.

이 불신의 서사는 곧 ‘질서의 약속’과 결합하며 스트롱맨의 귀환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신우파의 부상은 단순한 극단주의가 아니라 기득권의 위선과 방종을 넘어 ‘생활세계의 대변자’를 찾으려는 대중적 요구로 귀결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동안 ‘극우’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유럽 정당들의 유연한 변화다. 프랑스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은 국가 마비 운동의 대혼돈 속에 더는 반이민·반EU 구호만 외치지 않는다. 무정부적 무질서 상황 속에서도 최저임금 인상, 에너지 안정, 지방 일자리 같은 생활 의제를 강조하며 “엘리트가 아닌 국민 편”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결과적으로 ‘극우’ 이미지를 벗고 ‘민생주의 우파’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 총리 역시 비슷하다. 그는 과거 네오파시스트 계보와 무솔리니 지지 발언으로 극우 우려를 샀지만, 2022년 총리 취임 후 행보는 실용적이었다. 자영업자 감세, 에너지 보전 확대, 연금 인상 등 민생 지원책을 내세우고, 푸틴 찬양을 접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서며 EU·NATO 협력을 강조했다. 동시에 가족주의·보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여자 무솔리니’라는 프레임을 벗고 대안적 중도우파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르펜과 멜로니의 사례는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의 극우가 반(反)체제적 구호에 머물렀다면, 오늘날 신우파는 생활의 언어와 실용적 민생 정치로 대중의 불만을 흡수하며 새로운 정치 모델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의 역설이 만들어낸 혼돈 속에서, 각국 시민이 강한 리더십과 민생 중심의 정치 조합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극화 시대 민주주의 회복 출구, 강한 리더십과 민생의 결합
오늘날 양극화의 정치 토양은 이념보다 민생과 질서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세계화가 남긴 불평등과 정체성 갈등, 정보 과잉이 만든 제도 불신은 각국에서 새로운 스트롱맨과 신우파를 불러냈다. 민주주의가 이 요구를 타협과 협의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한다면, 시민은 계속해서 “더 강한 리더십”을 주문할 것이다.

정치가 다시 신뢰를 얻는 길은 분명하다. 첫째, 민생 중심의 실력주의-공정한 기회, 규제 혁파, 일자리와 안전을 실제로 체감하게 하는 정책과 둘째, 책임 있는 강한 리더십-질서를 세우되 법치와 절차를 존중하는 리더십의 길이다. 극단의 정치가 만든 전투의 언어를 넘어 생활의 언어로 합의를 복원할 때, 민주주의는 다시 작동한다. 결국 답은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강한 리더십과 민생의 결합, 그것이 양극화 시대 민주주의 회복의 유일한 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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