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지금”…동맹국 기술자에 쇠사슬·족쇄 채운 美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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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9.19. 오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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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 美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후폭풍’] ‘잘 짜인 각본’인가 ‘중구난방 행정’인가

● 손에는 수갑, 발에는 족쇄, 몸에는 쇠사슬…72명 한방에
● 구속 장비 사용 허가되지만…“인권침해 최소화했어야”
● ‘미란다 원칙 미고지’ 증언 나오면서 정당성 ‘흔들’
● 국무부, 상무부, 국토안보부 제각각… ‘중구난방 대처’에 무게
● “한국만의 문제 아냐” 우려에 트럼프 교통정리


9월 4일(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현장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 국토안보수사국(HSI), 마약단속국(DEA), 조지아주 순찰대 등이 합동으로 작전을 펼쳐 근로자 475명을 체포하고 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뒤돌아 차벽을 손으로 짚자 몸수색이 이어졌다. 손에는 수갑이, 발에는 족쇄가, 몸에는 쇠사슬이 걸렸다. 소지품은 압수돼 빨강·초록색 그물망에 담겼다. 현장에는 충격과 혼란이 가득했다. 9월 4일(이하 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현장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이 근로자 475명을 체포할 당시 상황이다. 이 가운데 한국인 기술자는 317명. 미국 잔류를 택한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무사히 귀국했지만 여진은 계속됐다. 해외 기업들을 향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 말하던 미국은 왜 동맹국 기술자를 쇠사슬로 묶었을까.

이번 사태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컸다. 한국에서는 경찰이 수갑은 사용하더라도 쇠사슬이나 족쇄는 사실상 쓰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에 구금된 이들은 범죄자라기보다 회사 업무차 파견된 근로자로, 일터에서 일하던 중 체포됐다. 게다가 ICE, 국토안보수사국(HSI), 마약단속국(DEA), 조지아주 순찰대 등이 합동으로 실시한 이번 단속은 외신에서도 “마치 전쟁터(war zone)에 들이닥친 것 같았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체포 다음 날 ICE가 자랑하듯 “조지아주에서 불법 고용과 연방 범죄를 대상으로 한 합동 작전을 주도했다”고 발표했고,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까지 공개해 파장을 키우기도 했다.

구속 장비 사용 허가되지만…“인권침해 최소화했어야”
구금된 한국인 노동자들은 며칠간 72명씩 한방에서 지냈고, 이후에야 2인 1실로 옮겨 생활했다. 생필품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식수에서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체포 시 미국 측이 미란다 원칙조차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구금자의 증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더했다. 이원준 법무법인 주원 외국(미국)변호사는 “외국인이라도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체포 및 구금 절차가 이뤄져야 했고, 법률상 보석이나 조건부 가석방이라는 방법이 열려 있었던 만큼 일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이민법은 이민법 판사의 판단에 따라 체포·구금된 외국인이 1500달러(약 210만 원)를 내면 보석이나, 조건부 가석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범죄 의심 현장을 제압할 때 물리적 장비 사용이 한국보다 폭넓게 인정되는 편이다. ICE의 체포·구금 기준에 따르면 수갑, 족쇄, 허리 구속용 쇠사슬·벨트(waist chain or belt) 등 구속 장비 사용은 “대상자의 안전 확보, 시설 질서 유지, 재산 손괴 방지 등을 위해 필요하고 합리적 수준”이라면 허용된다. 이 때문에 단순히 족쇄나 쇠사슬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문제 삼기 어렵다. 이 변호사 역시 “ICE 입장에서는 공무수행 대상자가 외국인근로자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 수백여 명이 현장에 있어 통제가 필요했다는 점, 실제로 일부 근로자가 체포를 피하려 환기구에 숨거나 연못으로 도망치기도 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체포 과정이 정당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 측이 미란다 원칙조차 고지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온 만큼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은 불식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의 쟁점은 “왜 하필 지금인가”에 모인다. 특히 한미 양국이 관세 협상의 세부안을 조율하던 시점에 한국 기업의 근로자 수백 명이 대거 구금되는 사태가 터지면서, 단순히 이민법 집행을 넘어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된다. 구금된 한국인 근로자 317명은 전자여행허가(ESTA, 170명), 단기 상용·관광 비자(B1·2, 146명), 취업허가(EAD, 1명) 비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미국 측은 전문직 취업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등을 받아야 하는데, 상당수가 관광 목적이라고 신고한 후 편법 근로를 해왔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반면 산업계는 “전문직 비자가 원활히 발급되지 못하면서 관광비자 등으로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며 이번 조치가 이례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9월 4일(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현장에서 한 한국인 근로자가 허리에 쇠사슬이 감기고 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부처 간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방증으로 분석했다. ‘잘 짜인 각본’보다는 ‘중구난방’이라는 표현이 현 상황을 잘 나타낸다는 것이다. 봉영식 연세대 객원교수는 “미국 국무부와 상무부, ICE가 속한 국토안보부가 동일 사안에 대해 제각각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교통 정리를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며 “각 부처가 별도 조율 없이 자신의 일을 강행한 탓에 이번 사태가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태 발발 일주일이 후인 9월 11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미국 CNBC 인터뷰에서 “한국은 (이재명) 대통령이 (워싱턴DC에) 왔을 때 (관세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유연성은 없다.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이다”라며 재압박했다. 반대로 크리스토퍼 랜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9월 14일 한국을 찾아 “향후 어떤 유사 사태도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며 “한국 근로자들의 기여에 합당한 비자가 발급될 수 있도록 후속 조치 관련 실무 협의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자”고 말했다. 앞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9월 11일 ‘동아일보’와의 화상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 손발이 서로 뭘 하는지 몰라서 발생하는 사태”라고 분석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사전에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수백 명이 체포될 수 있는 대규모 작전이고, 보통 이러한 작전은 수개월 동안 준비하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에 보고를 받았다고 봐야 한다”며 “다만 이후의 반응을 보면 이 정도의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민자 단속이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정도 대규모 작전은 사전에 대통령에게 전달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한국만의 문제 아냐” 우려에 트럼프 교통정리
이번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려 “외국 기업들이 매우 복잡한 제품, 기계, 다양한 ‘것들’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가지고 미국에 들어올 때, 나는 그들이 자국의 전문 인력을 일정 기간 데려와서, 이후 자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독특하고 복잡한 제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훈련시키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외국 기업의 인력 파견은 인정하되 미국인 고용과 기술이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지지층과 외국 기업 모두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미국 내에 건설 중인 한국 기업의 공장은 한두 곳이 아니다. 현재 반도체, 태양광, 전력기기, 자동차 부품, 화학, 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여 개 공장이 들어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유사한 일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다. 봉 교수는 “이번 사태가 미국 정부 요구에 따라 현지에 공장을 짓는 전 세계 기업들에 미국 진출을 다시 고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진화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만큼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이 커 유사한 일이 반복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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