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으로 살았던 20대보다 자유 열망하는 지금이 좋다”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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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배우 이민호의 내공

● 사적인 시간에는 ‘하찮음’ 추구
● ‘영 포티’ 목전, 나이 듦 개의치 않아
● ‘파친코’로 삶의 태도와 지향점 바뀌어
● 선배 이정재에게 건강한 자극 받아
● ‘무엇’보다 ‘어떤 기억 많이’ 남기는가
●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 듣고 싶어


이민호는 “20대 때의 경험과 인기 덕분에 십수년 동안 너무 행복한 길을 잘 왔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채워나가는 시기”라고 ‘현재’를 정의했다. MYM 엔터테인먼트
배우 이민호(38)는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3458만 명에 달한다.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지만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된 신데렐라는 아니다. 2003년 16세 때부터 단역을 전전하며 연기의 기본기를 다졌고, 2009년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 주연을 맡아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 ‘상속자들’ ‘푸른 바다의 전설’ 등 청춘 멜로물의 주인공을 도맡으며 김수현, 김우빈, 이종석과 함께 ‘신한류 4대 천왕’으로 칭송받았다. 

이대로 영원히 꽃길만 갈 것 같았지만 2020년 야심만만하게 출연한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제국’(2020)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은숙 작가가 집필하고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와 이민호, 김고은이 남녀 주인공으로 들어갔음에도 시청률 고전을 면치 못했다. 로맨스 장르에 찰떡처럼 어울리던 이민호가 결이 다른 캐릭터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다. 그는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 시즌1(2022)과 시즌2(2024)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냉혈한 고한수로 열연을 펼친 데 이어 7월 23일 개봉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선 인간미를 느끼기 힘든 유중혁이라는 인물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영화는 싱숑 작가의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액션물이다. 10년 이상 연재된 소설이 현실에서 재현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유중혁은 소설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인물로, 영화의 주인공 김독자(안효섭 분)가 생존자들과 함께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 결정적 도움을 준다. 등장과 동시에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캐릭터지만 주인공만큼 출연 분량이 많지 않다. 

이민호가 30대 중반 이후부터 기존 이미지와 차별화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나 연기에 대한 관점이 20대 때와 달라진 것일까. 나이 듦이 그의 일상과 인생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민호를 인터뷰이로 마주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의 발로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영화 ‘ 전지적 독자 시점”의 한 장면(위)과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30대 초반에 찾아온 위기감 
 영화 출연은 ‘강남 1970’(2015) 이후 10년 만이다. 소감이 어떤가. 

“영화를 할 땐 관객에게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작품이 진짜 잘 됐으면 좋겠고, 그런 기대와 부담을 안고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끌림이 작용해 이 영화에 출연했나. 

“우리 사회가 점점 개인화, 고립화가 심화하는 추세인데 그런 사회의 방향성과 닮은 지점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사람들과 함께할 때 빛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무엇보다 큰 동기 유발 요소였다.”

작품만 좋아서 출연한 건 아닐 것 같은데 유중혁이라는 인물의 어떤 면에 매료됐나.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 결과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주어진 상황을 사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30대 남자 배우로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20대는 경험의 시간이었고, 30대 중반까지는 그 경험을 정의하는 시간이었으며, 지금은 다시 경험하는 시기로 돌아간 것 같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자유’다. 자유롭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 무책임한 자유가 아닌, 책임질 수 있는 어른으로서 자유를 추구하고 싶다는 얘기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앞으로 10년을 굉장히 건강한 에너지로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자유를 추구하는 건 그동안 절제된 삶을 살아온 데 대한 보상 심리의 발로인가. 

“내 안에 극단적 성향이 공존한다. 20대 내내 책임을 온전히 짊어져 봤기 때문에 지금 자유를 외칠 수 있는 것 같고, 개인적으로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자유를 외쳐서 또 다른 경험의 세계를 즐기도록 내 삶을 이끌어도 괜찮은 시기라 판단한다. 나이를 먹은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긴 것 같다.”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영 포티(young forty)’라는 말이 있지 않나(웃음). 40대 진입이 머지않았다. 한살 한살 먹어갈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지지 않을까, 숫자에 얽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그 점만 빼면 나이 듦 자체를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30대 초반, ‘파친코’라는 작품을 만나기 전쯤 지금 이 에너지로는 앞으로 10년을 건강하게 활동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인생이나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이런 상태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황 아닌 방황을 할 때 ‘파친코’ 대본을 받았고 이런 촬영 환경, 이런 캐릭터라면 뭔가 새로운 것을 느껴볼 수 있겠다 싶어 오디션을 봤다. ‘파친코’에 출연하면서 쌓은 경험이 내게 정말 큰 영감을 줬다. 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 추구하는 것을 싹 바꿔놓았다.” 

연기에 임하는 자세도 20대 때와 달라졌나. 

“많이 달라진 것 같다. 20대 때는 내 원동력의 기반이 책임감이었다. 책임감이 너무 커서 도발적 생각이나 변주할 수 있는 폭이 굉장히 좁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대본을 보고 처음에 준비한 대로 연기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이를 배제하고 촬영 현장에서 연기하며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 나조차 짐작하기가 어렵다.”

정체성의 초기화
주인공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 건가. 

“인생을 살면서 뭔가를 내려놓은 적은 없는 것 같다. 20대 때부터 내가 맡은 역할의 성격이나 비중에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그때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꽃보다 남자’ 때부터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파친코’도 한국에서 제작됐다면 고한수 역에 나를 캐스팅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서른 살 넘어 선택의 폭이 넓어진 느낌이다.”

김병우 감독이 왜 유중혁 캐릭터에 캐스팅한 것 같나. 

“극에서 유중혁의 서사가 친절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등장과 함께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배우가 필요했던 걸로 안다. 유중혁이라는 인물은 독자(안효섭)에게 이익이 돼야 명확히 보일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독자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가 유중혁의 분량을 욕심내지 않고 한 장면만 나와도 된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놀라더라.” 

캐릭터 자체가 멋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연기하기가 부담스러웠을 법한데. 

“그런 평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대본을 읽었을 때 멋있는 포인트가 없었다. 나는 인물이 성장할 때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유중혁은 영화에서 서사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여서 멋있어 보이기 위한 고민은 많이 하지 않았다. 대신 좀 더 처절해 보이기 위한 몸동작이나 액션의 합에 신경 썼다.”

20대의 이민호는 스타성에 매몰돼 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배우로서 새롭게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을 엄청 받는다. 나 자신을 배우로 정의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늘 이민호라는 인간이 먼저고, 이민호라는 사람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어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내 정체성이 새롭게 시작된 것 같아 지금이 좋다.”

지금의 정체성을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초기화’다. 지금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스스로 채우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20대 때의 경험과 인기 덕분에 십수 년 동안 너무 행복한 길을 잘 왔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채워나가는 시기다. 내가 한 연기를 보면서 만족한 적이 없다. 좋은 결과가 있거나 대중에게 사랑받으면 ‘아 잘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에 도취돼 본 적이 없는 게 오히려 조금 아쉬울 정도다.”

글로벌 OTT에 공개된 출연작이 많아 팬층이 한층 넓어졌을 것 같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동과 인도 팬이 많아졌다. 팬이 보낸 글에 힌두어가 많이 보인다.”

인생을 희로애락(喜怒哀樂) 네 가지로 나눈다면 20~30대를 지배한 감정은 무엇인가. 

“‘꽃보다 남자’란 작품 이후로는 늘 ‘희’라서 ‘희’를 바탕으로 ‘노애락’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 것 같다. 다시 말해 아주 순수한 상태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친구들에겐 무해함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 말처럼,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다 보니 그 사랑을 바탕으로 매사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편이다. 그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고 있다.” 

주인공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힘든 적은 없나. 

“20대 내내 스스로 되게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그동안 내가 안정적인 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나를 다잡는 시간을 가졌다.” 

이민호는 “매사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편이며, 그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산다”고 말했다. MYM 엔터테인먼트
많이 기억되는 삶 살고파 
10년 뒤 꿈꾸는 모습이 있나.

“한 번도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축구 선수를 꿈꾼 이후에는 어떤 꿈을 꿔본 적이 없다. 유중혁과 닮았다고 느끼는 부분도 그것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삶을 나 역시 살아왔다.”

어떤 삶을 살아가길 바라나.

“피폐해지지 않는 삶. 건강해 보였으면 좋겠고, 누구에게든 참 괜찮은 인간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 인간으로서 그런 평을 들으면 좋은 배우라는 평가도 동반될 것 같다.”

이민호가 생각하는 좋은 인간이란?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본질적 고민을 하는 사람, 인간다운 게 뭔지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 점점 더 귀해지는 시대인 것 같다.” 

후배 연기자 안효섭 씨가 “이민호 형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다. 기분이 어땠나. 

“내가 십수년을 잘 지내왔구나 싶었다. 효섭이가 허투루 얘기하는 친구가 아니다. 말수가 많지 않고 진정성 있게 얘기하는 타입이다(웃음).” 

주위에 닮고 싶은 롤 모델이 있나.

“닮고 싶다기보다 내게 많은 영감을 주는 분이 있다. 이정재 선배다. 특정한 기준이나 만족 없이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치열하게 경험을 다지는 모습이 건강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이번 작품을 공동 제작했다. 연기 외에 제작에 참여하는 것도 이정재 씨의 영향인가. 

“아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에 관심이 많고, K-콘텐츠 종사자로서 세계화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런 생각으로 제작에 꾸준히 참여하려 한다.” 

연출이나 극작에도 관심이 있나. 

“가끔 글을 끄적일 때가 있었는데 이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도 하면 잘하겠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는데 구체적 계획은 없다.”

연출을 잘하겠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가 궁금하다. 아이디어가 많아서? 

“대본을 받으면 캐릭터를 먼저 보기보다 작품 전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해서가 아닌가 싶다. 먼저 큰 맥락을 보고 그러므로 이래야 한다, 그래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식의 화법을 사용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사적인 시간에는 자연과의 어우러짐이나 하찮음을 추구한다. 늘 너무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좋은 경험을 하다 보니 사적인 시간엔 완전히 그 반대되는, 예를 들면 아무런 계획 없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어디를 간다든지, 비가 막 내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든지 그런다. 자전거 타는 게 취미다.” 

이민호의 차기작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이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1974년 8·15 저격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동기를 묻자 이민호는 “진실보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진실이 왜 중요한지 물음을 던지는 영화라는 점에 매료돼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는 맏형이었지만 거기선 막내다. 극단적으로 상반된 역할이라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배우로서 궁극의 목표 혹은 포부가 뭔가. 

“얼마 전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냈다. 화장하고 나니 남는 건 뼈밖에 없었다.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무엇을 남기는가’가 아닌 ‘어떤 기억을 많이 남기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많이 기억될수록 나쁘지 않은 삶이 될 것 같다. 그게 내 인생의 목표이자 포부다. 많은 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 사는 게 가장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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