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측에서 유난히 긴 추석연휴를 보내던 이달 초부터 중순 사이, 북측에서도 다른 의미의 경축 분위기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10월 1일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기념하는 대사면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무장장비 전시회 '국방발전 - 2025'가 개막했고 각종 전시회와 축전이 뒤를 이었습니다. 당 창건 기념 경축대회와 대집단체조, 예술공연에 이어 10월 10일 밤에는 대규모 열병식도 개최됐습니다.
열병식 이후에도 군중시위와 횃불야회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졌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 기간 무려 5차례나 공식 연설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렸던 중국 전승절 열병식과 비슷하게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 역시 북중러를 중심으로 하는 반서방 연대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권력 서열 2위 리창 총리가 참석했고 러시아에서도 권력 서열 2위인 메드베데프 부의장이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못지않게, 어쩌면 이들보다 더 주목받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또 럼 베트남 서기장입니다.
10월 9일 밤에 열린 경축행사와 10월 10일 밤에 열린 열병식의 자리배치를 보면 김정은 위원장을 중심으로 오른쪽 옆에는 리창 중국 총리가 섰고, 왼쪽 옆에는 또 럼 베트남 서기장이 섰습니다. 메드베테프 러시아 부의장은 또 럼 서기장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 럼 서기장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만큼 중국이나 러시아의 2인자보다 더 중요하게 배치되는 게 당연하다는 분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리 배치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북한이 자리 배치에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 배치만으로도 북한이 베트남을 대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 럼 서기장은 베트남 최고 지도자로는 무려 18년 만에 북한을 찾았습니다. 10월 9일 베트남 하노이를 출발해 평양에 도착했고 11일 귀국했으니 평양에는 2박 3일간 머물렀습니다.
평양 도착 직후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 주재로 환영식을 개최했는데 예포 21발을 쏘고 군 명예위병대 사열도 했습니다.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관계를 '격상'시킨다는 의지를 확인했고 다음날인 10일에는 '5축 협력' 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외교부 간의 협정, 국방협력 의향서, 통신사 협정, 보건부 MOU, 상공회의소 MOU로 망라되는데 북한은 베트남에게 교류를 확대하고 개혁(도이머이) 경험을 공유해 줄 것을 요청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주북 베트남 대사관에 호찌민 동상을 제막했고 또 럼 서기장은 금수산태양궁전에 헌화한 뒤 만경대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일 밤 열병식에 참석한 겁니다.
북한의 길고 다양한 당 창건 경축행사에서 또 럼 서기장의 행보를 보면 사실상 가장 중요한 손님으로 대접받은 듯합니다. 물론 이런 행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이후 한때 소원해진 듯했던 북한과 베트남 양국 관계가 다시 과거처럼 끈끈해지고 있다는 관측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베트남만이 아닙니다. 라오스에서도 14년 만에 최고 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통룬 시술릿 라오스 주석은 또 럼 서기장보다 좀 이른 10월 7일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2박 3일간의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북한의 각종 전략무기가 등장한 무장장비전시회를 관람했고,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전통적 우호 협력 확대와 사회주의 연대 강화에 뜻을 모았습니다.
인도네시아도 12년 만에 외교부 장관이 방북했습니다. 수기오노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북한의 최선희 외무상과 만수대의사당에서 회담을 갖고 양국 친선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쌍무협상제도 수립에 관한 양해문을 조인했습니다.
아세안(ASEAN)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경제·사회적 협력과 발전을 목적으로 1967년 설립된 협력기구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0개 국가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습니다.
북한은 과거 이 아세안 국가들과의 외교에 적지 않은 공을 들여왔습니다.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역내 다자안보협의체도 아세안지역포럼(ARF)입니다.
북한의 핵개발과 이후 지속된 국제사회 대북제재 속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는데 이번 당 창건 경축행사를 계기로 회복세에 들어갔음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입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과 중국 모두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아세안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협력의 틈새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라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외교 지평을 넓히며 실익을 챙기겠다는 전략이란 말입니다.
이들 아세안 국가들은 우리나라에게도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외교 상대인 만큼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한의 외교전이 전개될 가능성을 전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당 창건 기념 경축행사에서 "사회주의 역량의 충실한 일원, 자주와 정의의 굳건한 보루로서 국제적 권위가 날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반서방 연대 강화를 거듭 천명하며 북한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가고 있다고 강조한 겁니다.
뒤에 중국과 러시아만 있는 게 아님을 과시하며 다른 나라로 지평을 확대해나가려는 북한의 공세적 외교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관측됩니다.
《뉴스인사이트팀 김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