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과 가격 인하 전쟁이 중국 경제 전반에 충격
정부는 산업정책을 유지하면서 소비 중심 구조 전환이라는 과제에 직면
중국 경제가 치열한 가격 전쟁과 과잉 생산 능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퇴행(內卷·네이쥬안)'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경제 구조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8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의하면, 중국 내 주요 산업 전반에서 가격 인하 경쟁이 격화되고 있으며, 수요 부진과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치열한 경쟁,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중국은 4년째 공장 출고가가 하락하고 있고, 소비자 물가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자 제조업체들은 수출에 의존하고 있으며, 값싼 중국산 제품의 유입에 대한 세계 각국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특히 전기차 산업이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중국 자동차 제조업체 샤오미와 비야디를 비롯한 100여 개 기업이 생존 경쟁을 벌이며 가격 인하에 나서고 있다. 현재 비야디 차량은 8,000달러(약 1,100만 원) 미만에도 구매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자동차판매협회에 따르면 상반기 수익을 낸 전기차 판매업체는 전체의 30%에 불과하며, 4분의 3은 일부 차량을 원가 이하로 판매했다. 단기적으로는 소비자에게 유리할 수 있지만, 기업의 비용 절감과 고용 축소로 이어지면서 가계 소득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 과잉생산, 전 산업으로 확산
중국의 '퇴행'은 단일 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과거 철강 등 국유기업 중심의 과잉 생산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민간 기업들이 주도하는 전기차·배터리·식품 배달 등 신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약 10년 전 정부는 공급 측 개혁으로 할당제와 기업 합병, '좀비 공장' 폐쇄를 추진해 공급 과잉을 어느 정도 통제했다. 하지만 현재는 산업 구조가 복잡해져 당시와 같은 하향식 개입이 어렵다는 분석이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천보 수석 연구원은 "이것은 과거와 차원이 다른 미지의 영역"이라고 진단했다.
◆ 노동 압박 심화, 사회 전반으로 파급
기업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도 악화되고 있다. 중국의 악명 높은 "996 근무제"(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는 이미 "007 근무제"(자정~자정, 주 7일)라는 자조 섞인 농담으로 변질됐다. 생산성 경쟁이 개인의 삶까지 파고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독일 막스 플랑크 사회인류학 연구소의 샹 비아오 소장은 "이 게임은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그만두고 싶어도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기업 간 과잉 경쟁이 개인의 삶을 옥죄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소비 중심 경제로의 전환 압박
전문가들은 투자와 제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입을 모은다. 소비 지출이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퇴행'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호주의 투자은행 맥쿼리그룹의 수석 경제학자 래리 후는 "중국 모델의 특징이자 결함이 바로 퇴화"라고 분석했다.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이 산업정책을 축소하고 소비를 진작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했다. 소비 촉진 방안으로는 ▲부동산 시장 안정화 ▲사회보장·연금 확대 ▲세제 개편 ▲서비스업 육성 ▲지출 확대 등이 제시됐다.
◆ 정부의 '반(反)퇴행' 카드…딜레마 지속
중국 정부도 최근 '반퇴행'을 공식 의제로 채택하고 있다. 과거엔 미국과 유럽의 우려를 일축했지만, 이제는 원가 이하 가격 책정 제한, 신규 생산 억제, 규제 강화 등으로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다만 급격한 생산 축소는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느린 조정은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딜레마는 여전하다.
8월 산업 기업 이익이 20% 급증하고 생산자물가 하락 폭이 축소되는 등 일부 개선 신호도 감지되고 있지만, 근본적 해결로 보기에는 이르다는 지적이 많다.
인민일보는 사설을 통해 "중국 경제의 문제는 산업 전환 과정의 성장통"이라며 기술 중심 산업정책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퇴행'은 단순한 경기 부진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과잉공급과 가격 전쟁, 내수 침체가 맞물리며 성장의 질 자체를 갉아먹는 상황이다. 정부의 점진적 대응이 단기적 안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소비 중심의 구조 전환이라는 과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라고 WSJ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