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하면 역시 바다다. 바다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시드니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이 있다. 본다이Bondi비치다. 시드니 중심가에서 333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간다. 본다이는 선주민 언어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란 뜻이다. 그만큼 파도가 높고 드세다. 1km 남짓 뻗은 해변에서 현지인들은 서핑에 여념이 없고, 관광객은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사진 포인트는 아이스버그 수영 클럽.
해변을 따라 걷는다. 버스에서 내린 곳이 해변 최남단이라 북진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동판과 안내판들이 본다이의 역사를 품고 있다. 2017년에 국립 서핑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거나, 본다이 서핑구조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60년 이상 연속 봉사하고 올해의 구조인상을 7번 수상한 피터 그레이엄이란 인물에 대한 헌사 등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상어방지 그물망을 겨우내 한시적으로 뗀다는 안내판. 최근 시드니는 환경단체들이 이 그물로 인해 다른 멸종위기 어종들이 잡혀 죽고, 상어방지 효과도 미미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시범적으로 3개 주요 해변에서 철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현지인 50대 서퍼가 상어한테 물려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제동이 걸린 상태.
이왕 본다이를 남쪽에서 출발해 훑은 김에 북쪽으로 더 걸어 가보기로 했다. 사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본다이에서 출발해 남쪽 쿠지해변까지 걸어가는 코스탈 워크(해변길)를 추천한다. 아예 북쪽에 길이 있긴 하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청개구리 심보인지 모험심인지 모를 뭔가가 동한 김에 무턱대고 발이 닿는 대로 가봤다. 본다이 비치의 끄트머리를 돌았다. 다행히 길이 있었다. 클리프 워크(절벽길)란 이름이다.
구관조에 오색앵무부터 전파천문학 신기원 연 안테나까지
비디갈biddigal 혹은 비지갈Bidjiga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공원을 관통하면서 절벽 위로 덥석덥석 올라탄다. 이곳 토착 선주민 부족의 이름이다. 이들은 1788년 영국에 의한 호주 개척이 처음 시작될 때 개척자들과 맞서 싸웠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부족들은 절망적인 전력 차이에도 30년이나 항전했지만, 결국 스러지고 말았다. 특히 역병이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름은 공원으로나마 남아 이어지고 있다. 비록 작더라도.
이젠 군청색에 하얀색 글씨로 'Cliff walk, Bondi to Manly'라고 써진 이정표만 따르면 된다. 한국처럼 친절하고 빼곡하게 달아 두진 않았고 확실히 모퉁이를 돌 때 정도만 있다. 그러니 이따금 나오는 안내판에 있는 지도에 그려진 트랙 사진을 찍어두고, 이를 구글 지도와 번갈아 확인하며 길을 골라 가야 한다. 데크 같은 명백한 길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마을길이나 벙벙한 공원 지역을 지나가는 때가 훨씬 많다.
시드니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북쪽으로 움푹 파인 곳은 다이아몬드Diamond만이다. 보석이 드나드는 항구였을 것 같은데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 일대를 소유했던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약간 김이 빠지지만 그래도 풍광만큼은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붉은 사암 절벽의 조화.
다이아몬드만의 옛 상징은 바위를 쌓고 절벽을 깎아 만든 계단과 암문이었다. 이곳은 옛 어부들이 절벽 아래 낚시터로 가려고 만든 시설로 인기 높은 사진 명소였다. 최근 이곳으로 접근하는 길을 모두 막았다. 관광객들이 무분별하게 인증사진을 찍다가 추락한 사망사고가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빠삐용'이 뛰어내린 절벽
다이아몬드만의 절벽을 넘으면 이제 절반 이상 끝낸 것. 크리스틴공원 너머 맥쿼리등대를 이정표 삼아 따라가면 된다. 겉보기엔 평범한 하얀색 등대인데 이것이 호주에 최초로 세워진 등대이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1818년부터 등대가 있었고, 현재의 등대는 1883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등대는 정상 작동 중이다.
등대를 지나면 사우스헤드 신호소. 약 200년 동안 사용된 통신시설이다. 폐쇄된 채 방치됐다가 2023년 리모델링한 유적지다. 다만 트레킹 중에는 건물 뒷면만 보고 지나가기에 둘러보려면 돌아나가야 한다. 바로 옆에 1892년 건설된 시그널 힐 포대는 잘 보인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포탄이 발사된 날짜가 1933년이라고 한다.
길 끝에서는 도로를 따라 갭Gap파크로 이어진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침식과 퇴적에 의해 절벽에 틈이 많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인기 명소인데 영화 '빠삐용' 촬영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뛰어내린 곳이 바로 이곳의 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