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실패 없는 노벨상앓이

김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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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나치 독일의 군수 시설을 폭격할 때마다 B-17 전투기를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총탄 세례로 벌집이 된 채 귀환한 전투기 동체를 분석해 취약점을 보강하려 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정보는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에 있다는 걸 몰랐다. 추락한 B-17의 손상 부위를 알아야 귀환하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있고, 개선점을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생존자 편향’에 빠지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의미다.

너도나도 혁신을 내걸지만 변죽만 울리는 이유도 실패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혁신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불합리, 저효율 관행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시도해서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용인하는 문화다. 화려한 혁신의 구호가 번번이 도루묵이 되는 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서다. 실패 경험이 축적되어 도약의 발판이 될 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해진다.

노벨상의 계절이 오면 한국에서는 탄식이 나온다. 올해는 일본의 과학 부문 2관왕 소식이 겹쳐 한국의 빈손이 더 초라해져 보인다. 역대 일본인 수상자 30명 중 물리학 12명, 화학 9명, 생리의학 6명 등 과학 분야가 압도적이다. 국가 차원의 장기적, 적극적 투자 덕분이라지만 한국의 연구 지원이 빈약해서 노벨상앓이가 반복된다고 하긴 어렵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노벨상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남을 따라해서는 안 되고, 완전히 새로운 것, 이 세상에 없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가 진가를 발휘하기까지 10년, 20년, 30년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단기간의 안전한 목표에 안주하고, 실패할 가능성을 꺼리는 연구 풍토로 노벨상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카이스트는 2021년 ‘실패연구소’를 설치하고 좌초, 미달성, 저성과 경험도 적극 드러내는 의식 전환에 나섰다. 뒤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부디 ‘실패연구소’가 실패하는 일이 없기를!

한국 사회에서 실패는 수치나 두려움의 영역이다. 압축 성장을 이루면서 선진 기술과 사회제도를 빠르게 익혀 응용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에 익숙해진 탓이다. 오늘(10월 13일)은 전 세계 과학자들이 실패를 공유해서 배우자고 만든 ‘세계 실패의 날’이다. 불확실하고 위험해도 먼저 치고 나가는 ‘퍼스트 펭귄’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획기적 발견 아래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묻혀 있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나설 때면 길을 잃을 각오가 있어야 새 길을 뚫는다. 실패를 드러내는 과학자를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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