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토킹 범죄의 절반 이상이 전 연인이나 배우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해자가 피해자를 감금하거나 폭행하는 등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중앙대 연구팀은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2021년 10월부터 1년간 확정판결이 내려진 스토킹 사건 193건을 분석한 결과를 사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Trauma, Violence, & Abuse)에 발표했습니다.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 법원 판결문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국내 첫 실증 연구입니다.
■ 직접 찾아가고, 메시지로 괴롭히고…스토킹의 일상화
먼저 스토킹 행동 유형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직접 접근한 경우가 75%로 가장 많았습니다.
반복적인 연락과 문자메시지 전송도 68%에 달했습니다.
직장이나 주거지에 예고 없이 방문(39%), 집 문 두드리는 행위(28%), 주거 침입(20%)이 뒤를 이었습니다.
흉기 등 위험한 물건을 사용한 스토킹도 7%였습니다.
여기엔 돌과 각종 칼, 가위, 망치, 유리병, 골프채 등이 포함됐습니다.
무엇보다 법원의 접근·통신 금지 명령 등 잠정조치 위반도 5명 중 1명꼴이었습니다.
■ 전 연인·배우자 스토킹이 52%… '이별 통보'에 분노
이번 분석에서 가해자의 52%가 피해자의 전 연인 또는 배우자였습니다. 그다음으로 지인(19%), 낯선 사람(16%), 이웃(6%), 가족(4%), 팬(2%)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토킹의 동기는 '이별·거절형'이 58%로 가장 많았고, 앙심을 품은 '원망/원한형'이 15%, 친해지고 싶은 '친밀추구형'이 8%, 관계를 맺는 방식이 미숙한 '무능형'과 신체 공격을 노리는 '포식형'이 각각 6%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서 ' 이별·거절형'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만나자"는 집착이나 "나를 버렸다"는 분노에서 비롯된 경우를 말합니다.
박시현 중앙대 적십자간호대학 교수는 "우리나라 스토킹 범죄의 상당수가 교제 폭력과 가정폭력의 연속선상에 있다"며 "연인 혹은 부부 관계였을 때에도 이미 가해자의 통제 행위나 폭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교수는 "이런 경우 피해자가 관계를 끝내려고 시도하면 가해자는 관계 단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계속 소유하고 통제를 지속하려는 욕구가 스토킹 범죄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버림받는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이면서 상대를 놓아주기보다는 집착하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나연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전 연인 스토킹의 경우, 불안정 애착과 거절 민감성이 높은 편"이라며 "거절을 당했을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교수는 "무엇보다 인지적 왜곡이 동반된 경우가 많다"며 "'상대가 결국 나한테 돌아올 것이다'라고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스토킹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이별·거절형’이 가장 위험… 감금·성폭력으로 이어져
이번 분석에서 전 연인이나 배우자에 의한 스토킹은 단순히 괴롭힘을 넘어 심각한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전 연인이나 배우자에 의한 스토킹의 14%에서 상해와 폭행이 자행되었는데, 이는 지인(9%)이나 낯선 사람(3%)으로부터의 스토킹보다 훨씬 높은 수치입니다.
강간과 성추행은 가해자가 낯선 사람인 경우가 22%로 가장 많았지만, 전 연인·배우자도 8%에 달했습니다.
특히 불법 납치와 감금은 전 연인이나 배우자 관계에서만 발생했습니다.
■ "피해자 일상 잘 알아 접근 쉬워… 중범죄 비화 위험"
박시현 교수는 "낯선 사람에 의한 스토킹은 감정적 소유 욕구가 약하지만, 친밀했던 관계에서 일어나는 스토킹은 관계를 통한 소유욕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납치와 감금이 전 연인 관계에서만 나타난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납치나 감금은 '지배권과 통제권'을 상대에게 발휘하려는 대표적인 폭력 행위"라며 "피해자를 물리적으로라도 내 곁에 붙잡아 둬서 불안을 해소하려는 심리"라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연인이나 배우자 사이에선 가해자가 피해자의 일상과 인맥, 생활 패턴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시와 접근, 협박이 훨씬 정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모든 이별이 위험한 건 아니지만, '통제 경향' 땐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통제 행위가 동반된 관계나 상대를 소유하려는 태도를 교제 폭력과 가정 폭력의 위험 신호로 봅니다. 이런 신호가 있다면 헤어지려는 시기에 스토킹이나 여러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박 교수는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위협 또는 자해로 협박하거나 직장, 가족, 지인들의 일상까지 침범하는 형태를 보일 수 있다"며 " 교제 또는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중에도 휴대전화나 위치추적 기술 등을 통해서 상대의 삶을 통제하거나 감시하고 사회로부터 고립하려는 행위가 있다면 폭력 행동의 지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 “이별·이혼 시 보호 체계 강화 필요”
현실적으로 개인이 사전에 스토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스토킹 위험을 인지했을 때 바로 신고할 수 있는 체계와 신변보호제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이별이나 이혼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한 스토킹 및 폭력 관련 조기 위험 평가를 도입하고 법원의 잠정조치 위반 시 즉각적인 제재와 강력한 처벌이 수반돼야 합니다.
박 교수는 "가해자는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반면 피해자가 학교나 직장을 관두는 경우가 많다"며 "학교나 직장에선 출입 관리 등 보안을 강화하고, 동선 변경을 지원해 주는 등 보호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아울러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통화와 메시지 내용 같은 스토킹 증거 수집을 지원해 주거나 주거 이전·전화번호 변경 등 신분 보호를 위해 경찰·법원 ·의료·쉼터 간 '행정 원스톱 제도'가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이별은 상대의 권리이며 스토킹은 관계의 연장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입니다. 이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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