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와 뉴질랜드 중간쯤, 남태평양 한복판에 섬나라 '아메리칸사모아'가 있다. 옆 나라 독립국 사모아를 '서사모아', 미국령인 아메리칸사모아를 '동사모아'라고도 한다. 경기 고양시보다 작은 면적인 200㎢에 55,000명이 산다. 마오리족 같은 폴리네시아인 구성이 90%를 넘는 이곳 사람들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컵라면이 있다. 육개장 사발면이다.
■ 연간 20억 원어치 먹는다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아메리칸사모아에서 농심의 '육개장 사발면'은 257만 개, 17억 8,000만 원어치가 팔렸다. 아메리칸사모아 인구 기준으로 1인당 46.7개, 한 달 평균 5.2개 제품을 소비한 셈이다. 1년이면 한 사람이 육개장 사발면을 평균 62개 먹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정도 속도라면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올해 '육개장 사발면' 매출만 2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예측된다. 매출 성장세도 매년 10% 내외를 기록할 정도로 가파르다.
■ "한국인 선원들이 컵라면 소개"
아메리칸사모아인들은 먹성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들이 물놀이 후 먹는 육개장 사발면의 '꿀맛'에 빠진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한국과의 인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이 참치잡이를 시작한 곳이 아메리칸사모아다. 1970~80년대엔 한국 원양어선 120여 척이 이용하는 어업 기지도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한 적 있다. 현재 우리 교민은 150명가량이다.
농심 관계자는 "1990년대 초 원양어선을 타던 한국인들에 의해 라면, 특히 용기면이라는 제품을 육개장 사발면으로 처음 접하게 된 것으로 안다"라면서 "이후 유사한 경쟁 제품도 진출했지만 아메리칸 사모아의 가장 대표적인 라면으로 육개장 사발면이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 모리셔스에서 인기 끄는 불닭볶음면
'불닭볶음면'은 세계 100여 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특히, 한국인에겐 신혼 여행지로 알려진 아프리카 남동부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매출 성장세가 뚜렷하다. 삼양식품은 2018년경 모리셔스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로 불닭볶음면 수출을 확대했다. 올해 모리셔스의 불닭볶음면 예상매출액은 약 3억 원으로, 올해 상반기에 이미 지난해 전체 매출을 뛰어넘었다.
외국에선 '불닭볶음면 챌린지'가 일종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은 듯 하다. 유튜브 등에선 "지옥 불이 혀를 감싼다", "이건 죽음의 국수"라는 외국인들 후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모리셔스 현지인 중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인도계 인구 비중이 높은 만큼, 특유의 매운맛이 시장 반응을 이끌어 낸 것 같다"고 설명했다.
■ 비운의 라면, 홍콩에서 뜨다
한국에선 인기가 없었지만, 해외에서 대박이 난 제품도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지난 7월 발간한 리포트에 따르면 오뚜기의 '보들보들치즈라면'은 한 홍콩 매체의 설문조사에서 현지인 선호도 1위에 올랐다. 오뚜기에 따르면 이 제품의 지난해 홍콩 수출액은 22억 원 수준이다.
보들보들 치즈라면은 치즈 분말이 들어 있어 얼큰하기보다는 고소한 라면이다. 2010년 7월 출시됐지만, 우리나라 시장에선 외면받았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엔 잘 안 맞았던 것이다. 반면 홍콩인들은 매운 소고기·돼지고기 육수보다, 맵지 않은 해산물·닭고기 육수를 선호한다. 현재 오뚜기는 보들보들치즈라면을 국내에서 팔지는 않고 수출용 제품만 만들고 있다.
■ '도시락' 러시아군 비상식량?…"사실무근"
해외에서 성공한 라면의 원조 격은 팔도 '도시락'이다. 1990년대 초 부산항 보따리 상인들이 러시아로 가져간 게 시초가 됐다. 덜 맵고 심심한(?) 맛, 보관이 쉬운 사각형 용기 등이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시락은 러시아 누적 판매량 66억 개(지난해 기준)를 돌파했고, 시장 점유율이 60%이 넘는 '러시아 국민라면' 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도시락이 러시아군 군수물자로 지정됐다는 얘기도 나왔다. 다른 컵라면과 달리 사각형 용기라 군장에 담기 편해 우리 국군의 일부 전방 사단은 행군 때 병사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팔도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설명했다. 팔도 관계자는 "군납 물품은 국방부 계약 입찰로 들어가는데 러시아군과 그런 계약을 맺은 바 없고 제안이 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라면은 김과 매년 농·수산식품 수출 1위 자리를 놓고 다툰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라면 수출액 5억 7,000만 달러(우리 돈 약 8,100억 원)에 상반기 성장률은 20%였다. 세계 라면 시장은 현재 60조 원 규모로, 연평균 4%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 식품회사 관계자는 "해외에 공장을 두고 현지에서 직접 라면을 생산해 판매하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 한국 라면의 세계 판매액 규모는 훨씬 크다"고 말했다.
(대문사진 : 원소민)
(인포그래픽 : 김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