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의약품에까지 관세 카드를 빼들었다. 지난 9월 25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생산설비를 '짓고 있지' 않은 기업의 상표(특허) 의약품에 대해 10월 1일부터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한 협상용 카드가 아니라 실제 시행 가능성을 내비친 발언이었다. 불과 며칠 뒤 백악관은 "기존 무역협정의 틀은 존중할 것"이라고 말하며 유럽·일본 등 일부 파트너에는 최대 15% 상한을 적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시장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첫 반응은 격렬했다. 아시아 주요 제약사들의 주가가 동시에 흔들렸고, 일본과 인도의 대표적인 제약 종목들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국 역시 여러 관련 기업들이 즉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수출에 의존하는 회사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우려해야 했다. "제네릭은 규제 대상에서 빠질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랐지만, 정책 경계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시장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우려했다.
수술용 장갑, 인슐린 펌프, MRI 장비까지 의료 공급망의 전반이 정치적 결정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제약기업의 손익을 넘어, 환자의 접근성·보험료·사회적 비용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판단된다.
미국의 관세 폭탄과 글로벌 충격
물론 정책의 기저에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제조업 부흥이라는 정치적 명분이 있다. 관세, 보조금, 수입 규제는 서로 다른 도구처럼 보이지만, 합쳐보면 하나의 지향점으로 수렴한다. 바로 '생산과 기술을 미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기조는 이미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산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반도체의 경우 반도체지원법(CHIPS법)을 통해 해외에서 생산시설을 확장하려는 기업에는 '가드레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즉 중국 내 투자 확대 시 미국 보조금을 박탈한다는 규정이다. 전기차 분야에서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과 부품의 조달 경로를 동맹국 중심으로 제한하고, 일부 지정학적 '우려 국가'와의 연계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에서도 수출 통제와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 지정이 강화되며, 기술이 국경을 넘는 경로는 점점 더 좁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다른 듯하지만 결국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미국에서 만들고, 미국의 안보에 부합해야 한다." 과거 미국이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규범을 주도하던 시절, 동맹국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맹조차 조건부 예외를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헬스케어 산업은 특히 민감하다. 의약품은 인류 공공재라는 성격상 자유무역의 수혜를 받아왔고, 1994년 WTO '제로포제로(Zero-for-Zero)' 합의 이후 다수의 의약품은 무관세였다. 이번 조치는 국제적 합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미국이 설정하려는 15% 상한은 겉보기에 '타협안'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기존의 무관세 체제에 비하면 큰 전환점이다. 15%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가격 인상이 아니라, 환자의 접근성과 보험 재정 안정성, 그리고 글로벌 제약사의 투자 판단에 연쇄적으로 미치는 충격이다.
한국 기업의 고민은 복잡하다. 최근 바이오 의약품과 첨단 의료기기에서 강점을 쌓아가는 한국은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공장을 미국에 새로 짓는다면 규제 승인과 밸리데이션 절차에만 최소 수년이 걸린다. 그 사이 기존 생산시설에서 공급을 줄여야 한다면 매출과 시장 점유율이 동시에 흔들린다. 더구나 미국은 단순히 물리적 공장 건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인력, 공급망 전반을 함께 '재미국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한 투자 결정이 아니라 사업 설계 전체를 다시 짜야 하는 중대한 도전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세 가지다. 우선 미국 시장 의존도를 관리해야 한다. 매출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는 구조라면, 이번과 같은 정책 변화가 기업 가치 전체를 흔든다. 이는 단순한 환율 리스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관세·규제가 곧바로 영업이익, 심지어 R&D 투자 여력까지 제약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공급망과 생산 거점을 다변화해야 한다.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규제가 전체 체인을 마비시키지 않도록 생산 모듈을 분산해야 한다. 공정 일부를 다른 국가에 분산하는 방식, CMO(위탁생산)와 CDMO(개발·생산 위탁)를 병행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정책 인텔리전스 내재화가 필요하다. 이제 정책 변화는 단순한 통관 문제가 아니라 임상과 상업화 로드맵의 '입력 변수'가 되었다. 예를 들어 Section 232 조사나 IRA 세부 규정은 앞으로 몇 년간 신약 상업화 시점과 수익성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모색해야 할 돌파구도 세 가지다. 대체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유럽, 중남미, 동남아 시장은 단순한 보완재가 아니라, 장기적 균형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다. 특히 지속 가능성을 놓고 보면 동남아는 인구 구조와 수요 측면에서 성장성이 크고, 중남미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 혁신 기술 중심 경쟁력도 필요하다. AI·바이오 융합, 리얼월드데이터(RWD), 디지털 치료기기(DTx), 웨어러블 의료기술 등은 국경을 넘어 확산하기 쉽다. 하드 인프라보다는 데이터와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관세나 물류 리스크에 덜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다자 협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도 중요하다. 미국 중심의 일방적 구도에서 벗어나려면, EU·일본·동남아와의 규제 상호인정 체계나 공급망 공동 구축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한 국가의 규제가 곧바로 글로벌 충격으로 번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이면에는 미국 리더십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규범의 공급자였지만, 이제는 자국 이익의 극대화자가 되었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의약품 등 각 산업마다 문구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우리의 안보와 일자리를 위해." 그 앞에서 동맹과 파트너는 점점 좁아지는 예외와 조건부 특혜만을 받을 뿐이다. 헬스케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세계화의 정의
결론은 불편하지만 분명하다. 이번 조치는 단순한 트럼프 식 이벤트가 아니라 구조적 패러다임 전환의 일부일 수 있다. 한국 제약·헬스케어 업계가 할 일은 단기 회피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체질 개선을 준비하는 것이다. 생산, 공급망, 규제 대응, 데이터 역량을 하나로 엮어야 관세의 파고가 지나가고 나서도 시장에서 가격과 시간을 지킬 수 있다.
1990년대 세계는 '관세의 종말'을 믿었다. 그러나 2025년의 세계질서는 '미국을 포함하되,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와의 연대'라는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통상과 안보가 뒤엉킨 시대, 생명과 의약품의 시간은 정치의 시간보다 훨씬 길고 무겁다. 한국은 이제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는 설계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아메리카 퍼스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