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데이터센터가 화마에 휩싸였다. 복구 시점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훼손이 심각하다. 우리는 이미 국가 기록의 소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6·25전쟁 때였다. 부동산등기부가 불타 사라지면서 누가 땅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IT 강국이라 자부하는 시대에 다시 한번 국가 기록이 소실됐다. 화재 원인과 대응에 대해서는 이미 격렬한 논의가 많이 있었고, 그에 대해 세세한 얘기를 또다시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의 역할,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국가는 로펌이자 IT기업이자 보험사?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국가법령정보'라는 사이트를 애용한다.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등 우리나라의 모든 법령을 총망한 사이트이다. 새로운 법령이 생겨나고 기존 법령도 빈번히 개정되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하곤 한다. 그러나 법제처에서 관리하는 '국가법령정보' 사이트도 이번 화재로 인해 먹통이 됐다. '국가법령정보'만이 아니다. 그동안 업무를 위해 들락거리며 찾아본 그 많은 자료가 정부발 정보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몇 해 전 법제처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법제처는 대국민 법률 AI 서비스를 구상 중이었고,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AI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던 초기 정부기관도 앞다퉈 AI 서비스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법률이나 AI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국가의 개입에 친숙하다. 철강·반도체·석유화학 등 대표 산업에도 국가의 개입이 짙게 묻어 있다. 성공한 전례는 답습하기 마련이기에 자타공인 선진국이 된 지금도 국가 개입의 요구는 크다.
MG손해보험 사태도 같은 궤에 있다. MG손해보험이 망할 지경이 됐다. 인수한다는 다른 보험사는 없었기에, 정상적 절차는 청산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가교 보험사라는 형식으로 국가가 인수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부가 손해보험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나선 모습이다. 전세 대출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가 핵심 금융기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국가는 로펌, IT기업이자 보험사가 되어가고 있다.
심판이 선수로 뛰면 경기는 불공정해진다. 필자는 리걸테크 기업을 운영했다. 법령, 판례 등 법률 정보를 모아 기술적으로 혁신하려는 시도였다. 그때 이런 조언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풍부한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민간 기업이 파고들 틈이 없다." 처음에는 이 조언이 가볍게 들렸다. 더 많은 정보, 더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신생 민간 기업이 무료로 제공되는 '국가법령정보'와 경쟁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큼 더 좋아서는 공짜 서비스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이제 국가가 공짜 AI 서비스를 내놓는다고 해보자. 그 순간 민간 AI 기업들은 국가가 내놓은 공짜 서비스와 경쟁해야 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구독 때문에 고민해 본 이용자라면 고객에게 돈을 쓰게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국가가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당에 민간 기업이 고객의 선택을 받기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공짜의 그림자가 싹트는 민간 기업 위에 드리운다.
물론 국가가 직접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시골마을의 공영버스는 대표적 예다. 시장의 논리로는 마을에 버스가 하루 한 대도 오가지 않는 곳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국가가 직접 버스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제 막 깨어나는 시장, 이미 시장 참여자가 충분한 시장에서 국가가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수로 뛸 이유는 없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심판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직접 선수로 뛰는 데 신중해야 한다. 심판과 선수라는 이중의 지위는 민간 경쟁자가 누릴 수 없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선수로 뛰는 순간 경기는 불공정해진다.
국가 책임이란 결국 세금 투입
국가가 공짜로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지 않으냐는 반문도 가능하다. 국가의 서비스를 압도하는 월등한 서비스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질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경쟁력 없는 민간 기업의 징징거림만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공짜 서비스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국가가 제공하는 법률 정보에는 늘 '정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의가 따라붙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틀려도 그만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국가에 책임을 물리면, 그것도 또 문제다. 국가의 책임이란 결국 세금 투입이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세금으로 공짜 서비스를 이용하고, 또 다른 사람이 낸 세금으로 배상까지 받는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책임 소재는 흐릿해지고 효율도 상실된다. 게다가 국가는 세금이란 무한한 자원으로 책임을 진다. 자연스럽게 책임에 후해지기 마련이다. 국가가 인심 좋게 책임지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책임지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나설 수도 없다. 언론에서는 국가가 변호사비를 많이 지출했다고, 국민을 상대로 항소했다고 비판한다. 국민은 고객과 주인이란 이중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서비스 제공자의 가장 큰 책임은 혁신이다. 더 나은 서비스 제공이 서비스 제공자의 제일 덕목이다. 그리고 혁신의 동기는 누가 뭐래도 인센티브다. 공공에서 혁신이 일어날 수 없는 근본적 이유다. 자칫 국가가 서비스 제공에 직접 나서면, 민간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사라지고, 혁신의 열기가 식을까 염려된다.
AI 시대, 천문학적인 돈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민간 기업이 감당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 순간일 수 있다. 물론 국가의 역할을 작은 감동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국가가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공짜로 운영하고, 친절한 법률 상담도 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감동 서비스도 중요하다. 다만 난세에는 난세의 문법이 있다. 국가가 국내 민간 기업과 경쟁할 때인지, 다시금 국가의 역할을 물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