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하며] 명절 리스크

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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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가족을 갈라놓은 지 오래다.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와 자식이 적이 되고, 남편과 아내도 적이 된다. 요즘은 80대 할아버지와 이대남 손자가 한 편이 되어 50대 아버지와 논쟁을 벌이는 공동전선도 형성된다고 하니 가볍게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게 됐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피보다 진한 게 정치인가 싶다. 이번 추석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과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후 맞는 첫 명절이다. 이번 추석 밥상에 이런 얘기들이 오른다면 그 식탁은 지난 4월 초 헌법재판소 앞 풍경의 축소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간조선 추석 합본호에서는 이런 명절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로 했다. 시사주간지에 정치 이야기가 빠지면 '시사'라는 단어를 떼어야 마땅하지만, 1년에 한 번, 그것도 명절에 정치를 걷어내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닌가 싶었다.

정치를 걷어낸 잡지를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하다가 옛날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옛날, 특히 1980년대 얘기를 한 번쯤 다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반년 전 정성헌 전 새마을운동중앙회 이사장과의 식사자리에서였다. 농민운동의 대부이자 개인적으로는 '시대의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정 전 이사장은 비싼 밥을 지양하고,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고기도 가급적 최소한으로 먹고,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그래서인지 정 전 이사장은 분명한 '식탁철학'이 있다. 그 식탁철학 중 대표적인 게 '1980년도의 밥상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가장 건강한 밥상'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 시절에는 유튜브도 소셜미디어(SNS)도 '흑백요리사'도 백종원도 없었는데 엄마의 밥상은 항상 맛있었고 속이 편했다.

그렇다고 반찬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밥상은 매일 비슷했고, 반찬도 그랬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따뜻한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고, 그 위에 계란프라이를 올려 쓱싹 비벼먹는 것이 최고의 별미였다. 주간조선의 추석 합본호는 여기서 착안해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밥상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고 우리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번 합본호의 주제는 '정치 빼고, 1980'이다.

아 참, 정치는 물론이고 시사 관련 이야기는 전부 걷어내려 하다가 이황희 기자가 쓴 조국혁신당 보좌관의 갑질 의혹은 넣었다. 이 보좌관은 기자의 취재가 시작되자 별도의 해명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그의 글 중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한 부분은 빼고, 취재와 관련한 내용은 그의 해명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상당 부분을 기사에 실었다. 근데 그의 글 마지막 부분이 거북했다. "기자의 사명이 사회 부조리를 알리는 일인지라 이것저것 묻고 밝혀내곤 하지만, 그것의 정치적 목적이 혼란한 당의 균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려고 가공할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면…." 전례없는 '선빵'에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황희 기자 기사에 정치적 굴레를 씌운 부분이 거슬렸다. 기사를 눈 씻고 다시 읽어봐도 정치적 해석은 없었고, 의도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정치 없는, 1980'이란 주제로 비춰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기사라 지면에 싣는 것으로. 이것이 과연 정치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독자님들에게 맡겨둔다.

정치보다 그 옛날 가족의 추억이 밥상머리 주제가 되는 한가위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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