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물론, 두뇌발달·기억력 향상 등 보드게임의 장점이 퍼지면서 최근에는 초등학교 수업시간에도, 어르신들의 방앗간 노인정에서도 보드게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할리갈리’, ‘루미큐브’ 등 글로벌 시장에서 소위 대박 난 보드게임이 하나 둘 씩 생겨나면서 보드게임 작가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각기 다른 룰과 매력을 지닌 보드게임은 과연 누구의 손에서 탄생하는 걸까.
대기업 개발자라는 탄탄한 직업을 뒤로하고 수년 전 보드게임 작가의 길을 들어 선 김은총(실버건) 보드게임 작가를 만났다. ‘투잡·쓰리잡’이 아닌 전업으로 보드게임 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그에게 ‘직업의 세계’를 들어봤다.
보통 보드게임 작가는 전업보다 투잡·쓰리잡으로 많이 하나 보군요.
“아무래도 게임을 만드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완성됐다고 해도 수입이 바로 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그래서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분들이 투잡으로 많이 뛰어들어요.”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진 않나 보네요.
“보드게임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청소년 작가도 있을 정도로 남녀노소 누구나 도전 가능해요. 최근엔 보드게임 회사들이 세계적으로 많이 늘어나고 있어 신입 작가들도 늘고 있는 추세예요”
보드게임작가협회 협회장이시군요. 협회에 등록된 작가는 몇 명 정도 되나요.
“한 400명 정도입니다. 꼭 작품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보드게임에 관심만 있으면 가입이 가능합니다.”
보드게임 작가 경력은 얼마나 되시나요.
“5년 좀 넘었어요. 그전에는 IT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다가 보드게임이 좋아서 전향한 케이스예요.”
개발자라면 연봉도 꽤나 높았을 텐데요.
“훨씬 높았죠. 근데 어려서부터 게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게임 회사로 이직을 해볼까도 생각해봤는데 잘 안됐죠. 우연히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추진했던 보드게임 개발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재밌었어요. 운 좋게도 수상을 하면서 직업을 바꾸게 됐죠.”
다시 개발자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보드게임 작가 2년 차까진 꽤 괜찮은 회사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기도 했어요. 근데 거절했죠. 지금도 수입이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어 만족하고 있어요.”
직접 개발한 보드게임 중에 대표작은 뭔가요.
“‘스테레오 마인드’ 시리즈에요. QR코드를 스캔하면 앱에 연결돼 음악을 틀 수 있어요. 음악을 듣고 플레이어들이 음악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골라요. 플레이어가 모두 같은 단어를 선택하면 성공하는 협력게임이에요. 예를 들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개 요일이 카드에 쓰여 있고 노래가 나와요. 노래에 제일 잘 어울리는 요일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은 채로 선택해요. 동시에 선택을 공개했을 때 모두 같은 요일을 골랐으면 성공인 거죠. 웬만한 보드게임 카페에도 있을 정도니 이 정도면 대표작이죠.(웃음)”
작가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저의 하루는 보드게임과 함께 시작되고 끝을 맺죠. 오전에 사무실에 출근하면 시제품을 제작하거나 테스트플레이를 진행하고, 정기적으로 게임 테스트 모임에도 참석해요. 공공기관 또는 보드게임 제작사로부터 외주 용역을 받아 게임을 만들기도 해요. 이를테면, 고령층을 위한 보드게임 제작 건이나 교통안전을 테마로 게임 제작 의뢰를 받기도 하죠. 학교나 기관에서 종종 강의도 나가고 있고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시간을 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테스트플레이’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테스트는 보통 3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전문가 테스트에요. 일반인들에게 게임을 보여줘도 퀄리티 높은 피드백을 듣기 어려워요. 그래서 주변 작가들한테 먼저 보여주고 피드백을 듣죠. 이후 지인이나 보드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거쳐요. 마지막 단계는 보드게임 박람회 같은 곳에 나가 관람객들의 반응을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보드게임을 제작하는 전문가들의 반응이 중요하겠군요.
“그렇죠. 보통 한 100번 정도 테스트를 거치는 것 같아요. 제가 쓰는 사무실은 작가 7명이 함께 있는데, 그 이유도 역시 테스트하고 바로 수정하기가 유용하기 때문이죠. 하루에 10번 넘게 테스트하기도 해요.”
보드게임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게임마다 다른데, 완구류 같은 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아이디어가 잘 나오면 카드 게임 같은 건 하루 만에 만들 때도 있어요. 평균 게임 하나 개발하는 데 1년 정도, 출시되는 데까지 2년 정도 걸려요.”
보드게임 제작부터 출시까지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우선 어떤 게임을 만들지 기획을 하게 되는데, 기획에 중요한 ‘개발 3요소’가 바로 ▲메커니즘 ▲테마 ▲구성물이에요. 메커니즘은 게임의 규칙이에요. 몇 명이 할 수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게임 룰을 정하는 거죠. 그 다음 동물이나 영화, 작품 등을 반영하는 게임의 테마를 정합니다. 구성물의 경우, 카드나 자석, 옷걸이, 손수건 등을 어떻게 활용할 지를 정하는 단계예요. 이 3요소를 다 채우게 되면 보드게임의 기본은 만들어 지게 되죠.”
개발 3요소를 정한 후에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보통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만들어 보드게임 회사에 제안을 합니다. 또는 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나 박람회에 나가 보드게임 회사에 선보이기도 해요. 그렇게 계약하고 출시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해외 회사에는 직접 보여주기가 물리적으로 어려워 영상을 찍어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제안한 게임이 마음에 들면 이후 미팅을 잡고 해외 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해요.”
회사에 제안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게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요. 게임이 마음에 들면 당장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있는 반면, 구두계약 이후 몇 년 간 끌다가 계약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어요. 다행히 계약을 맺게 되면 ‘아트워크-디자인-생산’ 단계를 거쳐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죠. 작가의 성향에 따라 전 과정을 혼자 진행해 출시하는 경우도 있어요. 반면, 회사에서 출시되는 것보다 홍보마케팅은 좀 부족할 수 있죠.”
해외 시장에서 한국 작가들은 환영받는 편인가요.
“아시아나 유럽에서 한국 보드게임 작가가 꽤 인기 있어요. 일본에서 ‘도쿄 게임 마켓’이라는 세계적인 박람회가 열리는데,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반기는 분위기예요. 독일 등 유럽에서도 아시아 작가들을 선호하고요. 특히 한국·일본 작가들이 최근 해외의 규모 있는 보드게임대회에서 수상을 독식하고 있거든요. 요즘 트렌드가 쉽고 간편한 휴대용 게임들을 선호하는데, 그런 부류의 게임을 한국·일본 작가들이 잘 만들어요.(웃음)”
평균 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요.
“평균이 의미 없는 게, 게임이 얼마나 많이 팔렸냐에 따라 평균이 완전 달라요.(웃음) 회사와 계약을 맺으면 판매 수익의 일정 비율을 인세로 받아요. 출판 시스템과 비슷하죠. 계약 방식에 따라 인세는 다양한데, 한국은 평균적으로 도매가 기준 4~8% 정도 받아요. 그냥 계약금만 받고 끝나는 케이스가 훨씬 많아요. 다들 ‘하나 걸리자’라는 마인드로 게임을 만들어요.(웃음)”
“남녀노소 막론하고 다 함께 즐기는 모습에서 보람 느껴… 세대를 아우르는 가치가 있는 보드게임”
작가마다 본인만의 색깔, 추구하는 게임 스타일이 있을 거 같아요.
“전략 게임만 만들거나, 2인 전용 게임만 만드는 작가들도 있어요. 전 주로 파티 게임이나 패밀리 게임 같이 남녀노소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요. 집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대중적인 게임이 제 콘셉트죠.”
그럼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게임이어야 하겠군요.
“그렇죠. 그래서인지 행사장에서 초등학생들이 제 게임에 관심을 많이 보여요. 요즘엔 학교 정식 수업에도 보드게임 수업이 있어 초·중학교에 강의 요청도 꽤 된답니다.(웃음)”
새로운 게임을 꾸준히 개발해야 하는 직업이라 영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모바일 게임이나 야외에서 운동도 많이 하려고 해요. 박람회나 전시회에서도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하죠. 말씀하신대로 늘 새로운 영역을 접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다 보니 여행이나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늘 아이디어를 찾곤 합니다.”
직업병이 있나요.
“게임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규칙을 분석하는 습관이 있어요. ‘이 게임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 작가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생각하는 거죠. 순수하게 즐겨야 할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이미 ‘분석모드’가 켜져 있어요. 때로는 즐거움보다 연구에 가까운 경험이 되어버리기도 해요.”
보드게임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멘탈이 중요합니다. 보드게임은 누구나 해보고 피드백을 줄 수 있잖아요. 피드백을 많이 받아야 수정 방향을 알 수 있고 발전도 할 수 있어요. 상처받지 않고 피드백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멘탈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손재주나 IQ가 높아야 보드게임을 잘 만들진 않을까요.
“크게 영향이 있어 보이진 않아요. 이 직업의 장점 중 하나가 초등학생부터 고령층까지 누구나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진입할 수 있다는 게 보드게임 작가의 장점이에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선호하는 보드게임 트렌드가 있나요.
“요즘 쇼츠의 시대잖아요. 게임도 마찬가지로 휴대하기 좋고, 규칙이 쉽고, 빨리 끝나는 카드 게임류가 요즘 대세죠. 규칙 설명부터 게임 플레이까지 1시간 이내로 짧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 분위기예요.”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제가 만든 게임을 남녀노소 막론하고 함께 즐기며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껴요. 가끔 보드게임 카페에서 제가 만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때 게임이 끝나면 “또 하고 싶다”라는 반응을 보일 때 젤 행복하죠.(웃음)”
향후 보드게임 작가의 비전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최근 작가 협회에서 강의할 때 AI 보드게임이 주제로 자주 나오고 있어요. 그럼에도 손으로 만지고 얼굴을 마주하며 즐기는 보드게임 경험은 디지털로 대체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AI는 기존에 있는 게임을 짜깁기해서 만들기 때문에 완벽한 게임이 나오기도 어렵고요. 대신 AI 스피커를 활용해서 하는 1인 보드게임이 새롭게 나오면서 AI를 사람 대신 써서 같이 플레이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보드게임은 아이들 학습에도 효과적이고, 어르신들 치매 예방에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세대를 아우르는 가치가 있어요. 앞으로 보드게임 산업은 더 성장할 것이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한국 보드게임의 가능성을 넓히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싶어요.”
[사진=이승재 기자]
[최예람 대학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