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제대로 해냈다"... 뉴욕에 등장한 '태극기 피켓'의 정체 [최현정의 웰컴 투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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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세계 속의 K문화] '민주주의를 지켜낸 나라' 한국에 대한 부러움 커져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을 통해 다시 한 번 'K-POP은 세계적인 문화'라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드라마·음식·뷰티 산업 등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면서, 관광객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25 K문화>는 세계인들의 삶에 더 밀접하게 다가가고 있는 한국 문화를 보여주며, '한류'의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 방향성을 모색해봅니다. <편집자말>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행진 대열이 지나가는 데만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 어디선가 새로 합류한 인파가 또 다른 대열을 만들어서, 끝인가 하면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지난 18일 미 전역에서 궐기한 '노 킹스 데이(No Kings Day)' 시위의 뉴욕 현장이다.

타임스 스퀘어가 위치한 7번 에비뉴는 분노와 축제의 에너지가 넘쳤다. 토요일 오전부터 유모차를 몰고 휠체어를 타고 걸으며 춤추고 소리치는 시위대들이 차량을 대신하고 있다. 이 시위는 미국 역사상 단일 집회로는 최대 기록이란다. 시위를 '테러'라고 일컫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맞서, 시민들은 개구리와 공룡, 상어와 포켓몬 인형으로 한껏 치장하고 손수 만들어 온 각양각색 피켓을 들었다.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쿠데타를 멈춰라."
"뉴욕에서 손 떼시지."
"(트럼프) 관세가 내 일자리를 날렸다."
"왕은 없어, 1776년(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해)부터!"
"미국의 왕은 '버거킹'밖에."
"이케아 캐비닛이 (현 내각보다) 낫겠다."
"ICE(이민세관단속국)는 예수님도 추방할 걸."
"우리는 모두 이민자들"

"대통령 탄핵한 한국 사례를 열심히 공부해야"

 10/18 No Kings Day 참가자
ⓒ 최현정

뉴욕 33 스트릿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 인도 턱에 올라서서 시위대들이 만들어 온 피켓들을 읽는데 이게 웬만한 쇼츠보다, 광고보다 재미있고 기발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피켓 하나.

"KOREA got it RIGHT(한국은 제대로 해냈다)"

태극기까지 '제대로' 인쇄해 만든 피켓의 주인공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다. 피켓을 가리키며 수많은 인파 속에 목소리를 높여 물어본다.

"한국이 뭘 해냈다는 건가?"

"민주주의를 지켰지않나.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한국 의회가 국민들하고 제대로 막아낸 걸 알고 있다."

오늘 집회에 나온 미국인들이 걱정하는 '계엄령'이 정말로 발생했던 10개월 전 한국의 상황을, 이 깔끔한 차림의 할아버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얘기한다.

"그때 어떤 의원이 의회 담을 넘어가는 걸 봤다. <뉴욕타임스> 메인에 뜨더라. 결국 독재자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감옥까지 보낸 한국 사례를 지금 우린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제리(Jerry)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같이 온 친구를 비롯해서 다른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한국 사례를 소개한다. 뉴욕 도로 위 시위대 한복판에서 우리나라 얘기를 들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어디선가 귀에 감기는 노래가 들려 까치발을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니 <골든(Golden)>이 시위대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성능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Up Up Up"이 나올 땐 주변 참가자들의 팔이 힘차게 올라가며 행진의 템포가 한껏 높아진다.

아이돌 뉴진스 멤버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버니 응원봉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 비눗방울을 퐁퐁 쏘아대며 행진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몇 달 전 우리의 광화문과 헌재 앞의 평화로운 풍경을 이들도 보았겠지 싶었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뭐.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이거 진짜 한국 음식 맞아?

오래 자리 잡고 살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이사하고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됐다. 카리브해 음식들을 팔던 낡은 식당들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카페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같은 시기다. 브런치를 먹으러 찾은 동네 카페의 메뉴판에 낯선 메뉴들이 새로 입점해 있다. 떡볶이(Ttukbokki), 제육볶음(Jeyuk Bokkeumbap), 불고기 샌드위치(Bulgogi Sandwich).

동네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정확한 발음으로 떡볶이와 제육과 불고기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내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들의 비주얼을 훑어보고 국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서빙한 히스패닉 직원에게 물었다.

"너, 떡볶이 먹어 본 적 없지?"

해맑게 웃으며 직원이 대답한다.

"응, 한 번도 없어."

국물 흥건한 떡볶이에 너무 단 제육과 불고기를 입에 넣으며 다른 메뉴보다 1.5배 비싼 가격이 아까웠다. 내 지인들도 늘 묻는다. 이거 "진짜 한국 음식(Authentic Korean) 맞아?"

그런데 요 며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맛볼 기회를 가졌다. 160여 년간 미군의 선박 제조, 조립을 했던 브루클린 네이비 야드에서 개최한 K-컬처·K-스타트업 페스티벌 행사장(KOOM 페스티벌)에서다. 보고 싶었던 에픽하이나 자이언티의 공연은 매진이었지만, 대신 한국의 유명한 창업자들과 기업인들이 나온다는 낮 행사는 참가할 수 있었다.

 Koom Festival
ⓒ 최현정

어렸을 때, 교보문고에서 여성 기업인의 책을 구입해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첫날 강연자 중 한 사람으로 나와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특권'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행운을 사용하면 좋을지 바람직한 예가 된다 싶었다. 배송시장의 신흥 강자로 등장한 회사의 창업자가 들려주는 일의 목표, 관점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잘 모르지만 꽤 탄탄한 위치에 오른 AI 관련 스타트업의 젊은 대표들도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실수와 성공의 경험을 나눴다. 다들 맨땅에 헤딩하는 고생을 했고 결과적으로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올랐다며, 자신감 있고 겸손하고 진솔했다. 듣다 보면 나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영감이 떠올랐다.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시간인 듯했다. 한국 국내 정치의 안정과 함께 이들의 에너지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책
ⓒ 최현정

지난 13일, 우리 동네 도서관 북클럽에서 선정한 책은 <We Do Not Part(작별하지 않는다)>였다. 후다닥 저녁을 먹고 도서관 2층 콘퍼런스 룸에서 하는 모임에 자리를 잡았다. 비트윈 커버(Between Cover)라는 제목의 이 북클럽은 도서관장 크리스(Chris)가 직접 진행하는 일반 성인 독서 모임인데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선정해 함께 읽고 토론한다. 지난 9월엔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Small things Like These(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고, 11월엔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Orbital(궤도)>를 읽는다.

"좀 많이 어려웠어...."

대부분의 참가자가 과거와 현재, 생과 사의 교차가 수시로 드러나는 시적인 산문 글이 낯설고 쉽지 않았다 고백한다. 한국어 원서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가 한강에 대해 꽤 소상히 알고 있는 나는 진행자 크리스보다 더 많은 말을 해야 했다.

한국어 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신청해 하루 만에 받았다. 내가 사는 카운티의 78개 공공도서관은 협력 도서관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약 13만 권 이상의 자료를 보유 중이다. 그중 10%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책인데, 최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책들이 많이 들어와 웬만한 베스트셀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된 덕이다.

전에는 몰라도 상관없던 한국이란 나라의 현대사와 그 속에 숨어있는 미국 정부의 역할,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까지 책을 통해 함께 나눈다. 하드커버 표지에 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황금색 스티커가 그 권위를 더해주면서 말이다.

크리스가 준비한 오늘의 질문 11번째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 얘기였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라는 말의 의미를 물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다른 멤버들을 대신해 내가 답해야 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작년 10월,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 최초의 아시아 여성이고 최초의 70년대생으로. 일주일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렸고 한국인들은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다시 한 번 학습했지. 그리고 두 달 후 계엄이 발생했어. 본능적으로 <소년이 온다> 속 인물들을 자신에게 투영한 한국인들은 국회로 달려가고 거리로 나가 계엄에 저항했어. 그리고 현재, 그 대통령은 탄핵돼 감옥에 있어.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한국인은 위 말의 의미를 100% 체득했지. 폭력은 없어지지 않겠지만 저항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는 믿음을."

가장 열심인 북클럽 멤버인 안드레아는 부럽다고 했다. "아, 너네는... 대통령을... 탄핵했구나"하며. 바바라는 그게 문학의 힘이 아닌가 말한다. 그들은 젊은 작가들과 능동적인 독자들이 존재하는 한국 출판계를 더 알고 싶어 했다.

민주주의를 지켜낸 나라

'K'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한국 관련 콘텐츠는 확실히 큰 흐름을 타고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뿐 아니라 음식과 문학 작품 등등에서. 군사력이나 경제적 강압이 아닌, 나라 자체에 대한 매력과 호감이라는 소프트 파워가 더 큰 기세로 세계인들에게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그 정점은 지난 18일 미국의 2700여 곳에서 700만 명을 거리로 나오게 한, '위태로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이다. '세계'라는 무대에서 조명받고 있는 한국의 선택들 하나하나가 그래서 지금 더 중요하다.

전쟁으로 부서지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울며 분노하는 나라, 불합리한 요구의 강압적 외교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의연한 나라. 정책과 행정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늘 모색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한류도 더 융성하면 좋겠다. 세계가 불안하고 위험한 2025년에 그걸 제대로 실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건 우리 국민들,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아서다. 아직 진정한 우리의 매운맛을 보여주진 않았다 싶은 요즈음이다.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 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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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 No Kings Day 참가자. 두려움과 추위와 긴 기다림을 견디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처럼, 다종다양한 구호로 즐겁게 분노하는 뉴요커들을 보며 미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파워풀하다고 느낀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 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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