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지 '실장'은 왜 '여사'가 되었나

박성우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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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비롯 일각에서 여사 호칭 사용... 여성 공직자 향한 퇴행적 비판 아닌지 돌이켜봐야문재인 정부 초창기, 영부인을 가리켜 한 언론이 김정숙씨라고 호칭했다가 비판 여론의 포화를 맞은 적이 있었다. 해당 언론은 일관되게 대통령의 부인을 씨라고 불러왔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결국 대통령 부인의 호칭을 여사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에서는 생뚱 맞은 '여사' 호칭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언론이 아닌 정치권에서 불거졌는데 대상이 남다르다. 이재명 대통령의 부인인 김혜경씨가 아닌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준석 "여사님 그냥 제발", 박정훈 "김현지 여사 보호하는 민주당"

 지난 16일 이준석 대표와 박정훈 의원은 김현지 제1부속실장을 여사라고 칭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 이준석 대표, 박정훈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16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정훈 의원의 '김현지 여사'에 대한 기자회견 이후 김우영 의원과 박정훈 의원 간의 다른 일로 인한 대립이 격화되면서 수습이 안되고 있다"며 "일면식도 없어 저도 여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여사님 그냥 제발 국회에 좀 나오십시오"라며 김 실장을 여사로 칭했다.

이후 김 실장이 경기동부연합과 연계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한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현지 여사' 하나 보호하려고 국감을 엉망으로 만든 민주당. 최고 존엄 맞는 모양!"이라고 썼다.

20일 이기인 개혁신당 사무총장 또한 페이스북에 이 대통령과 김 실장의 2003년 영상을 공개하며 "오늘 국민이 묻고 있는 것은 단 하나다. '그 위의 위'에 있는 인물, 김현지 여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이라고 했다.

실장 아닌 여사로 부르겠다는 개혁신당... 공직자를 성별로 환원하겠다는 호명 방식

한편 이준석 대표는 개혁신당은 앞으로도 김 실장을 여사로 부를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대표는 20일 최고위원회의 이후 취재진에게 "저희는 김현지 실장을 김현지 여사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진짜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김 실장을 여사로 표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김 실장은 엄연히 대통령의 일정 관리와 수행 등을 맡은 공직자다. 지금껏 수많은 공직자들이 각양각색의 의혹과 논란에 휩싸였지만 적어도 직책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이 대표를 포함해 김 실장을 여사로 부른 이들은 '기혼 여성이나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성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정의와 부합하는 호칭이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따지면 여성 고위 공직자는 모두 여사로 칭해도 무방하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김 실장을 여사로 부르는 일련의 행위는 권력자의 곁에 있는 여자로 암시하는 것이자 정치인의 언어가 젠더 편견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공직자가 갖춰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힐난은 합리적 비판이 아닌 그저 추측에 불과한 사적 관계를 기반으로 공직자를 여성이라는 성별로 환원하는 호명 방식이다.

공직자 검증, 당연히 필요하지만 '여사' 운운이 제대로 된 검증인가

김현지 실장이 정부 인사나 운영 과정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문제는 당연히 검증받아야 한다. 20년 넘게 대통령과 함께 일해 온 공직자가 국정감사를 앞두고 총무비서관에서 부속실장으로 보직을 변경하고, 휴대전화 기기를 교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검증이나 근거 없이 다짜고짜 대통령과의 관계를 설명하라는 식으로 여성 공직자를 여사로 칭하는 일은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 조롱일 뿐이다. 여사라는 말 속에는 공적인 책임보다 사적인 관계를 부각해 여성을 주변화하는 오래된 시선이 깔려 있다.

언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다. 언어가 퇴행하면 정치도 퇴행한다. 결국 '김현지 여사'라는 표현은 우리 정치권이 여성 공직자를 그저 여성인 존재로만 끌어내리는 퇴행을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 질문에 이제 정치가 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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