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 도착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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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를 배출했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언론은 두 개의 수식어를 반복했다. '아베의 후계자', 그리고 '첫 여성 총리'. 그러나 이 두 이름표는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일본 정치가 변화의 내용을 상징으로 대신하려는 태도를 드러낼 뿐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등장은 아베 시대의 연장선으로 포장되지만,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베 체제에 대한 정서적 미련이 집단 무의식으로 재현된 노스탤지어(향수)의 반사일 뿐이다. 감정의 잔향이 정치의 언어로 옮겨가며, 표상과 내용이 어긋난 상징의 정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베의 후계자? 그건 '시대착오'다
아베의 정치가 국민의 감정을 결집시켜 정당성을 세웠다면, 다카이치의 정치는 행정의 장치를 재배열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렇지만 이 전환은 아베가 남긴 정서의 유산을 기술적 명분으로 바꾸어 반복할 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감정의 계승은 기능의 언어 속에서 희미해졌고, 계승은 결국 모방으로 전락했다.
아베 신조의 시대를 움직인 것은 감정이었다. "잃어버린 일본을 되찾자", "강한 일본의 부활" 같은 구호는 경제정책을 넘어 하나의 감정 구조였다.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은 금융과 재정, 성장 전략의 조합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국가의 자존을 회복하겠다는 심리적 설계가 있었다. 보수의 정치가 감정적 결집으로 작동하던 시기였다.
▲ 2014년 9월 3일, 당시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첫 내각 회의 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새 내각 각료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아베 총리 오른쪽에 총무대신으로 임명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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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20년대 중반의 일본은 전혀 다른 조건 위에 있다. 인플레이션, 인구 감소, 노동력 공백, 공급망 재편 등은 정체성보다 기능의 문제를 전면에 세웠다. 정치의 언어가 '자존'에서 '관리'로, '감정'에서 '제도'로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구조 변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다카이치의 발언은 '경제안보', '위기관리', '산업재편' 같은 기술관료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보수의 핵심이 정체성에서 기능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개인의 차이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보수주의 자체가 감정 중심의 형태에서 기능 중심의 형태로 옮겨가고 있다. 다카이치가 스스로를 '아베의 계승자'라 부르지만, 그 언어는 이미 시간과 어긋나 있다. 감정으로 국민을 결집하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금의 일본은 정체성의 열망보다 시스템의 효율로 불안을 다스리는 사회다.
그래서 다카이치의 정치에서 '계승'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아베의 시대를 잇는 인물이 아니라, 아베의 방식을 시대의 다른 맥락 속에서 반복하는 정치인이다. 아베의 보수가 감정의 시대를 대변했다면, 다카이치의 보수는 관리의 시대를 상징한다. '아베의 후계자'라는 수식어는 닮음의 표현이 아니라, 시대착오의 표지에 가깝다.
여성 총리의 등장, 진보의 증거인가? 천만에
▲ 지난 21일, 일본 도쿄에 있는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총리 선거에서 신임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동료 의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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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를 둘러싼 정치적 언어는 이렇게 상징을 앞세운다. '아베의 후계자'라는 말이 시대의 변화를 가렸듯, '첫 여성 총리'라는 표현도 현실의 불평등을 가린다. 서로 다른 두 수식어지만, 구조는 같다. 상징이 정치의 설명을 대신할 때, 실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등장은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유리천장 돌파'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상의 과잉이 만들어낸 착시에 가깝다. 여성이 최고 권력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과 여성의 삶이 개선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이 없다. 정치가 한 개인의 서사에 집중할수록 구조의 문제는 더 잘 감춰진다.
다카이치의 젠더 정책 좌표는 분명하다.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 법제화에 반대하고, 동성혼 법제화를 거부하며, 황실 승계에서는 남계 유지를 원칙으로 삼는다. 정치 영역의 여성 쿼터에도 부정적이다. 한마디로 법·제도 층위에서 다카이치는 성평등의 확장을 체계적으로 제동 거는 정치인이다.
그는 자민당 총재 선출 직후 인사말에서 "모두 마차를 끄는 말처럼 일해 주시기 바란다. 저 자신도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을 버리겠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겠다"라고 말했다. 리더의 이런 수사법은 노동을 젠더 중립의 이름으로 미화하면서, 여성의 돌봄 부담을 은폐하는 사실상 반(反)페미니즘적 언어 구조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여성 리더의 등장'이라는 표식과 달리, 일·가정의 성별 역할을 고착시키는 정책 언어가 구성된다.
실제로 다카이치 내각의 여성 각료는 20%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기시다 내각보다 오히려 줄어든 수치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5년 성 격차지수에서 일본은 146개국 중 118위를 기록했다. 정치 부문만 보면 순위는 더 낮다. 이 수치들은 일본 사회가 '첫 여성 총리'의 상징 아래서도 여전히 대표성의 불균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수의 엘리트가 소수자 전체의 대표로 소비될 때, 사회는 변화를 이룬 듯 보이지만 실질의 불평등은 더욱 공고해진다. 재벌가 출신의 여성 CEO나 정치 명문가의 여성 총리가 등장하면, 그 자체가 진보의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력은 오히려 그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갱신한다. 대표의 얼굴이 바뀌어도 구조의 방향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징이 현실의 변화를 대신하는 순간, 불평등은 감춰지는 대신 정교하게 재조립된다.
다카이치의 등장은 여성 정치의 전진이라기보다, 일본 보수 정치의 구조적 정체가 만들어낸 역설이다. 여성의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여성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 언어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적 규범을 자신의 정치 언어로 삼음으로써, 질서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내부 동력이 된다. 그가 차지한 자리는 역사적 진보의 증거가 아니라, 여전히 변하지 않은 질서의 거울이다.
정치의 상징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한쪽은 변화의 약속이고, 다른 한쪽은 구조의 보존이다. 일본이 다카이치를 통해 보여준 것은, 상징이 어떻게 제도의 언어 속에서 길들여지는가 하는 사례다. '첫 여성 총리'라는 사건은 일본 민주주의의 성숙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재구성을 위한 장식적 혁신에 가깝다. 변화의 언어가 체제의 언어로 포섭될 때, 정치의 상징은 더 이상 저항이 아니라 관리의 도구가 된다.
그렇게 길들여진 상징은 언론의 감동 서사를 거쳐 시민의 동의로 번역되고, 결국 묵인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 사회가 자신을 속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감동은 질문을 대신하고, 합의는 침묵으로 바뀐다. 상징에 감동한 사회는 더 이상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 불평등은 변화의 언어를 빌려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일본의 정치가 보여주는 이 구조는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채, 비슷한 상징에 감동하고 그 이면의 불평등에는 침묵한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일본에만 던질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한다.
상징이 서사를 만들고 현실을 가릴 때, 불평등은 고발되지 않고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은 침묵 속에서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