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강력한 민주당 지지 세력(파란 주)이었다가 지금은 압도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는 곳(붉은 주)으로 바뀐 미국 켄터키주의 한 작은 도시 파이크빌을 찾아 심층 인터뷰를 한 책이다. 이 책은 한 공동체를 지탱했던 경제가 무너질 때 그 여파가 어떻게 사람들의 감정, 특히 자존심과 자부심의 붕괴로 이어지는지, 그런 붕괴가 어떻게 증오를 낳는지를 조목조목 알려준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윤리의 자부심, 잠시 생활이 무너졌지만 회복할 수 있다는 자부심 등이 사람을 지탱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기반을 이루는 자부심의 원천인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오래된 기술이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쓸모없어지고 가치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파이크빌 지역 경제를 지탱했던 탄광 산업은 경제 구조의 변화와 함께 쇠락했다.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광부들은 갱도 벽의 석탄층을 파악하고, 폭파 타이밍을 맞추고, 장비를 수리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다른 곳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자부심의 추락이다. 탄광업의 쇠락과 함께 일부 주민이 지역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자부심의 몰락은 지역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연달아 수치심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이들에 대한 복수의 열망을 촉발한다. 그 열망을 정치인들이 이용한다.
자부심의 추락... 을과 을의 대립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 CJ ENM |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아래 <어쩔수>)를 보면서 나는 긍지를 느꼈지만 쇠락해서 일자리가 없어질 때 느끼는 자부심의 추락과 그것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때 생기는 한국적 상황이 어떨지를 떠올렸다. 심각한 주제의 영화이지만, 박찬욱 특유의 과잉된 이미지, 연극적인 인물과 공간의 제시, 강렬한 색감으로 치장된 미장센이 돋보이는 블랙코미디이다. 이런 이미지와 설정의 과잉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왜 감독은 블랙코미디라는 형식을 선택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그런 질문을 떠올렸다. 블랙코미디는 개념 자체가 언뜻 모순적이다. 경쾌하고 즐거운 웃음과 음울한 어두움의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다. 블랙코미디가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희극적 형식으로 다루는 이유? 일반적 희극(코미디)처럼 관객을 단순히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편한 주제를 웃음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어쩔수>는 유만수(이병헌)의 실직과 자부심의 붕괴를 둘러싼 여러 인물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낸다. 박찬욱은 <어쩔수>가 "내가 만든 영화 중 제일 웃기는 영화"라고 했다는데, 그 웃음은 통상적인 웃음이 될 수 없다. 비애와 씁쓸함이 담긴 불편한 웃음이다. 이 영화를 두고 좋고 나쁨이 엇갈리는 이유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장면을 보면서, 편하게 웃을 수는 없다. 블랙코미디의 효과이다.
▲ 책 <도둑맞은 자부심> 겉표지 |
ⓒ 어크로스 |
위에 언급한 <도둑맞은 자부심>은 광산업의 몰락을 다룬다. 광산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어쩔수>의 주인공 유만수도 비슷하게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제지업에서 일한다. 그는 25년 경력의 특수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만큼 자신이 성취한 현재 삶에 만족하는 유만수는 아내 이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그 성취를 자축한다.
인상적이지만 인공적인 영화의 화면구성은 그런 만족감을 드러내며 선명한 색감으로 촬영된, 만수의 단독 주택은 그 점을 부각한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이 행복한 가정 내부에 잠재한 상처가 드러나지만, 표면적으로는 만수가 자부심을 느끼듯이 한국 사회 구성원이 욕망하는 중산층 이상의 삶을 만수는 이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회사에서 보내준 장어를 만수는 장기 근속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해석하지만, 그건 오해로 판명된다. 만수의 표현대로 그는 해고되어 "모가지가 잘리게" 된다. 여기서부터 웃기지만 슬픈 영화의 정서가 만들어진다.
올해의 펄프맨까지 수상한 제지 전문가도 세상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어쩔수>는 만수가 해고된 이유를 상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제지 업체 사주가 아마도 미국 기업으로 바뀌면서 이윤 논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어쩔수>는 비장함이 아니라 어설프기에 웃긴 항의의 모습을 잠깐 비추지만, 해고의 부당함에 맞서는 뻔한 계급투쟁의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는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랬듯이 대립 구도는 갑(자본)과 을(노동)이 아니라 을들 사이에 설정된다. 살기 위해 을들끼리 싸우고 잡아먹는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겠다.
아내에게 약속한 3개월의 구직 도전이 실패하자, 만수는 유령회사를 차려 실직한 제지 전문가들의 이력서를 받아서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최선출(박희순), 구범모(이성민), 고신조(차승원)가 최종 제거 대상으로 뽑힌다. 물론 이런 가정은 극단적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설정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무엇이 어쩔 수가 없는가?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 CJ ENM |
얼마 전 유만수와 비슷한 나이대인, 한국 사회의 척추를 이루는 40대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령대별로는 10대, 20대, 30대, 40대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했다. 40대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로 올라선 것은 198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한겨레>)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짐작건대 핵심 이유는 실직 등 경제적 문제다. 생존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파괴하지 못하면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이유다.
엉겁결에 구범모를 없앤 유만수는 점차 옅어지는 죄의식과 함께 고신조, 최선출을 없애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영화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만수의 해고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해고하는 쪽도, 만수처럼 당하는 쪽도, 만수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 최선출 같은 이도, 그 자리를 욕망하는 만수도 각기 "어쩔 수가 없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관객은 기본적으로 만수의 시점에서 영화에서 벌어지는 황당하면서도 씁쓸한 소동을 보고 해석하게 된다. 무너지는 중산층의 꿈, 잃어버릴 멋진 집과 붕괴할 위험에 처한 단란한 가족을 앞에 두고, 만수는 가장으로서 심각한 자부심의 위기에 처한다. <어쩔수>를 자부심을 지키려고 극단적 행동을 감수하는 중년 남편, 아버지, 노동자의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수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는가? 황당하게 죽게 되는 구범모를 두고 그의 아내 이아라(염혜란)는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힐난하지만, 정말 그럴까? 제거 대상으로 연이어 사라지는 고신조, 최선출도 그들만의 살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만수의 행복을 위해 제거된다.
<어쩔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파고들기보다는 우당탕하는 소란 속에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재취업에 성공한, 그 와중에서 은연중 공모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만수와 미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이 아이러니를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만수의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구범모, 고신조, 최선출의 죽음 위에 세워진 영화의 결말이 나는 불편하다. 이 시대에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부당한 희생을 전제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만수는 실직 공포 없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AI에 기반을 둔 자동화 공장에서 홀로 일하는 결말부 만수의 모습, 기계에 의해 뿌리가 뽑히는 나무들의 처참한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제지업이 자동화 때문에 더는 인간 노동이 필요 없어지듯이, 만수도 자동화 기계로 인해 곧 사라지게 될 거라는 착잡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인가? 뛰어난 문학, 영화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물어야 할 질문을 예리하게 제기한다. <어쩔수>는 그런 질문을 감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