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벨트 공장에서 탄생한 예술, 불안을 다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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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석 작가의 전시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 오프닝 간담회를 다녀와서
▲ 멈춘 시간의 벽 부산 동래의 옛 동일고무벨트 공장 외경. 40년 동안 멈춰 있던 이 공간은, 한원석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했다
ⓒ 이향림

한 시대의 기계음이 멈춘 자리에서 예술이 다시 숨을 쉰다. 부산 동래의 옛 동일고무벨트 공장이 40여 년 간의 침묵 끝에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폐허가 된 산업 공간이 예술가의 손끝에서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한 순간. 지난 17일 현장을 직접 찾았다.

이곳은 해방 직후 부산의 산업화를 상징하던 공간이었다. 고무벨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공장은
수십 년동안 노동자들의 땀과 기계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생산 거점이 부산 금정구 금사동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의 시계는 멈췄다. 한때 활력이 넘치던 1000평 남짓한 건물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40년 만에 이 잊힌 공간이 한 설치미술가의 손길로 다시 깨어났다. 무너짐과 낡음을 지우지 않은 채, 시간의 흔적 위에 예술을 덧입혔다.

낡은 철계단 위에서 만난 붉은 빛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삐걱거릴 듯했고, 손잡이는 차가웠다. 천장에는 오래된 철골 구조가 드러나 있었고, 어딘가 스산한 공기의 떨림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곧 몰입으로 바뀌었다. 한쪽 벽 너머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을 향해 눈길을 옮기다 반대편을 보았다. 낡은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빈 소파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는 순간 마치 내 몸이 빠져나가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빛은 내 마음 깊은 곳의 '심연' 같았다. 그 빛은 사랑일까, 지나간 열정일까,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한 순간일까.

붉은 빛이 깃든 방을 나와 옆으로 향하니 또 하나의 환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오래 전 홍수가 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잠을 자고 밥을 해 먹던 장소였다고 한다. 예술의 공간이 되기 전, 이곳은 공동체의 피난처이자 삶의 흔적이 남은 기억의 터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남은 물소리 마저 그때의 온기를 간직한 듯 느껴졌다.

▲ 심연의 빛 어둠 속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 빛. 오래된 공장의 틈새에서 피어난 이 빛은, 한원석 작가가 말하는 ‘내면의 심연’을 상징한다.
ⓒ 이향림

1층으로 내려가자 영상이 나를 맞았다. 흑백 화면 속에는 과거 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작가가 작업을 이어가는 장면이 교차했다. 마치 한 편의 오래된 영화, 시네마 천국의 잔상 같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111개의 폐지관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은 공장 벽을 타고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뒤편에는 오래된 고무벨트 생산기계들이 조명 아래 놓여 있었다. 시간의 층이 겹친 듯한 풍경. 낡은 기계와 새로운 예술이 공존하는 그 공간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음악이라는 회전축 위에서 함께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잠시 사진을 멈추고, 나의 의식이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려보았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의 장면이 스쳤다. 집 앞에서 말을 타며 까르륵 웃던 나, 그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 웃던 젊은 엄마. 예술은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온다.

예술로 다시 태어난 탄생의 공간

한원석 작가는 전시를 마친 뒤 이어진 간담회에서 "이 공장은 동일고무벨트라는 회사를 탄생하게 한 자궁 같은 곳이었다"고 말했다. 천장에서 물이 새는데도 모두 막아버릴 수 없었다며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정비 외 가능한 한 원초적인 공간의 모습을 살리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장의 오래된 질감과 구조를 존중하는 것이 곧 예술의 시작이었다"며 "못 하나 박지 않으려 애썼고, 심지어 목욕탕의 먼지도 그대로 두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과거의 산업이 새로운 예술로 다시 태어난 '탄생의 공간'이었다.

간담회가 열린 '수안 카페'는 공장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동일고무벨트의 거친 벽면에서 불과 몇 분 거리지만, 그곳은 마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원형 디자인의 현대적 건물이었다. 통유리 벽면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빛, 넓은 테라스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여유로운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정원 한편에는 한원석 작가의 지관 스피커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자연의 소리와 예술의 울림이 함께 어우러져 공장 안에서 시작된 전시가 카페 정원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듯했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전시 안내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예술은 그렇게 공장의 벽을 넘어,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검은 구멍'이라는 전시 제목의 의미를 묻자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검정색은 저에게 흰색보다 더 따뜻하고, 휴식을 주는 색이에요. 그리고 '구멍'은 회사도 집도 아닌, 사람들의 출퇴근 시간 사이에 놓인 경계의 공간이에요. 그 경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게 불안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속하려 애쓰기보다 경계 그 자체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 17일 오프닝 간담회 중

그의 설명은 전시 제목을 넘어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과도 맞닿아 있었다. 무엇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시대, 그는 그 불안을 예술의 언어로 다독이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빛

전시장을 나서니 풀밭 위에 커다란 폐지관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에서 새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진짜 새 무리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웃었다. 공장의 잔향 속에서도 생명이 피어난다는 사실, 그것이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대답이었다. 풀냄새와 바람, 그리고 여운이 뒤섞인 채 나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낡은 공장이 예술의 자궁이 되고, 멈춰 있던 시간은 소리와 빛으로 다시 흘러간다. 한원석의 이번 전시는 산업화 이후의 기억을 넘어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경계'의 의미를 되묻는다. 검은 구멍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붉은 빛처럼, 예술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전시 정보

전시명 :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

작가 : 한원석

기간 : 2025년 10월 17일 ~ 11월 16일

장소 : 부산 동일고무벨트 동래공장

기획 : 김최은영(인천아트쇼 예술감독)

사운드 : 유영은 / 퍼포먼스: 이예찬, 김관지, 표혜인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 동일고무벨트, 부산광역시, 부산은행, 주한영국대사관

관람시간 : 12:00–19:00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입장료 : 무료

홈페이지 : www.wonsukhan.com

인스타그램 : @blackhole_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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