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 결혼한 박문숙은 10년이 채 안 되는 결혼생활 끝에 1990년 12월 남편 김병곤과 사별했다. 그 짧은 결혼생활 중에서도 2년 반은 투옥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나머지 기간도 늘 바빴고, 마지막 투병한 기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낸 기간은 턱없이 짧았다. 큰딸 희진은 그래도 아빠를 기억하는데 작은딸 은희는 아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 1981년 결혼 후 신혼여행 중의 박문숙 김병곤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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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몫 대신하듯 왕성한 사회활동
남편은 떠났어도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겉으로나마 문숙은 평소대로 묵직하고 의연했다. 경실련 자원재활용센터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유가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치 남편이 못 이룬 꿈을 대신하겠다는 듯 시민사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둘째 은희는 엄마가 집으로 들어오면 썩은 짚더미처럼 무너졌다고 회상한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랑 대화가 안 됐어요. 늘 흘려듣고 항상 고민이 있고, 우리가 뭔 말을 해도 핸드폰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밖에서 진을 다 빼고, 집에 오면 지쳐서."
그럼에도 문숙은 더욱 세차게 사회활동에 헌신했다. 덕분에 1995년, 여성농민단체 몫으로 제4대 경기도의회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돼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경기도정을 감시하며 지역구를 살피는 의정활동을 너무나도 열심히, 신나게 해서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정치인답게 세심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여론을 움직이는 등 아주 의욕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 경기도의원 3년은 아마 문숙에겐 제일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경기도의원 박문숙의 얼굴은 빛나고 당당해 보였다. 비례 다음엔 지역구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당에서 특별하게 챙겨주는 의원이 없으면 하늘에 별따기다. 문숙은 한국여성농민연구소 부이사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농업기반공사 사외이사도 맡았다. 연구소야 어차피 무보수 명예직이고 사외이사 급여도 뻔할 텐데 문숙이는 어디서든 제가 먼저 지갑을 열었다. 밥도 사고, 차도 사고. 밤이 늦으면 제 차로 기어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뭔 돈이 있다고 저래 쓰나 걱정도 됐지만 한편으론 남편 치료비를 후원한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어 저러려니 짐작했다.
그러나 매일 지쳐서 늦게 들어와 쓰러지는 엄마를 보며 작은딸 은희는 불안하기만 했다.
"아빠는 원래 없었으니까, 아빠의 부재가 불편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맨날 불안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 구두소리가 들려야 그때부터 잠이 들었고 길에서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 그렇게 무서웠어. 엄마 죽었을까 봐. 그래서 어린애인데도 비 오고 눈 와도 하나도 안 좋았어. 걱정돼서. 엄마가 운전하고 다니는데 안 들어오니까. 실체에 다가가는 게 무섭고 부담스러우니까. 우리 광명 하안동 살 때 엄마랑 명자 이모랑 설이 이모랑 밤새 웃고 떠들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니까. 엄마가 집에 들어와 우리 본 척도 안 하고 이모들과 놀아도 그게 좋았어. 엄마가 웃는 게 좋고 또 이모들과 있으니까 안심도 되고."
민청련 3인방 남편 중 90년 김병곤이, 94년 이범영이 떠나고 나서 3인방은 뿔뿔이 흩어졌다. 문숙이는 안양으로, 김설이는 양수리로, 그리고 96년 나는 유방암 수술을 받고 전라도 광주로 이사 갔다.
▲ 1990년 3월 8일, 김병곤 회복을 위한 기도회 및 후원회 결성식에서 가족대표로 인사하는 박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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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갔다더니 실은 홀로 암 투병
이미 둘이 죽었는데 나까지. 문숙이와 설이는 암은 곧 죽음이라 생각해 장례 날 받아놓은 것처럼 절망했다. 광주 이사를 앞둔 어느 날 문숙이가 인사동 맞춤 옷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천연염색 천으로 우리 옷을 만드는 아주 고급 옷집이었다. 다짜고짜 치수를 재게 하더니 잇꽃 다홍 저고리에 쪽물 통치마를 맞추는 것이었다.
"언니, 이거 입고 화장도 꼭 하고. 광주 가서는 절대 초라하게 보이지 말어."
눈물이 핑 돌았다. 하안동에서 엉겨 붙어 살던 남자 중 유일하게 남은 나의 남편 김희택. 동지들은 정치권에 들어가 화려한 변신을 하는데 변변한 일자리 하나 못 얻고 병든 마누라 끌고 낙향하는 것이 못내 속상하고 가슴 아팠을 게다. 담양 시골로 들어왔다고 하루 내려와 자고 간 문숙이 심란한 전화를 한 것이 아마 2005년 쯤이었던 것같다.
"언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한쪽 가슴에 결절이 있다고 재검을 받으라네."
그래서 결절이라고 다 악성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빨리 검사부터 받아보라고 채근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전화를 했더니 다행히 암은 아니지만 앞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라는 진단이 나왔단다. 여자들은 워낙 물혹이 많으니까. 나는 문숙의 말을 듣고 마음을 푹 놨다.
들리는 말이나 간간이 하는 전화로 근황을 듣곤 했는데 문숙은 아주 바쁘게 살고 있었다. 도의원 역임 후 민주당 경기도지사나 경기도 교육감 선거캠프에서 직책을 맡아 정신없이 돌아다닌다는 소식도 전했다. 정무 감각도 뛰어나고, 정치적 안목도 선명하고 무엇보다 정치를 하려는 의지도 강하고, 부지런하고. 여성 정치인 재목으론 박문숙만 한 사람도 드문데, 제발 잘 되길 바랐는데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했다. 역시 당원 기여도만으로는 공천을 거머쥘 수 없는 게 여의도 법칙인가 보다 했다.
2006년 문숙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취임했다. 처음으로 월급다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된 것이다. 큰딸 희진은 대학원생이었고 은희도 미대에 들어가 두 아이 학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어쨌든 가정경제에 청신호가 켜진 셈이었다.
그러나 깐깐하고 일 욕심이 많았던 문숙의 눈에 기념사업회의 느슨한 운영이 영 성에 안 찼던 것 같다. 가끔 양수리에 사는 설이를 찾아가 힘들고 지친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사실 그때 문숙은 남몰래 유방암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만은 발설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은 악성 암이었다.
왜 수술을 거부했을까? 아마도 남편 김병곤을 돌보며 현대의학에 깊은 불신이 생겼던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민간요법이나 식이요법 같은 자가 치료를 선택한 것이다. 기념사업회 재직할 때 어디 잠깐 외국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서너 차례 들은 적이 있다. 실은 외국이 아니라 대체의학 치료를 받느라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 광명시 철산리 주공 아파트에서 살 때, 뒷산에서 찍은 남편 김병곤과 두 딸 희진, 은희. 두 딸이 아빠와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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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으로 감추고 건강한듯 연출
201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국장을 마지막으로 문숙은 기념사업회를 퇴직했다. 희진이도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을 가졌고, 대학 마치고 무대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일본 유학을 택한 은희도 얼추 공부가 끝날 즈음이었다.
그랬는데 2012년 유방암이 재발했다. 그 사이에 얼마나 진행이 됐던지 암 덩이가 겉으로 만져질 정도였다. 주변 모르게 수술을 받고 치료는 방사선은 거부하고 항암제 투약만 선택했다.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은희가 있는 오사카로 가 모처럼 행복한 일본 여행을 즐겼다.
암 환자의 치료기간은 지난하다. 반강제로 휴식을 하게 된 문숙은 아이들과 제주 여행도 하고 하루 이틀 시간을 내 강원도, 전라도 숲속 길을 걷기도 하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산을 좋아하던 문숙이었다. 암 환자라고 그 성질이 어디 가겠나. 민간요법을 연구하는 틈틈이 파주 집에 온갖 열매로 효소를 담아 진열장을 빼곡이 채웠다.
2013년 9월 은희가 다시 귀국했을 때 문숙의 상태는 더 나빠 보였다.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가 다시 삐죽이 올라오고 있어 민청련 창립 30주년 기념식도 못 갔다. 11월에 은희가 다시 귀국해서 보니 9월에 볼 때랑은 상태가 완전히 달라져 말이 아니었다.
강남세브란스 병원 차트를 들고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진료기록을 훑어보던 의사가 면전에 대고 앞으로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벼락을 맞고 다시 강남세브란스로 돌아왔다. 도쿄에서 취업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던 은희도 모든 것을 접고 짐을 챙겨 들어왔다.
그해 12월 6일 나는 김병곤 기일에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문숙이를 만났다. 한 팔에 붕대를 맸는데, 그냥 팔을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곱게 화장하고 가발을 쓴 덕분에 환자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과 평소처럼 웃고 농담하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사람들이 성한 문숙이를 본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연락 차단하고 홀로 임종
수술 후에도 통증은 심하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온 암 덩어리를 제거한 상처는 아물지를 않고. 세브란스 병원에선 늦었지만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루씩 입원해 방사선치료를 시작했다. 그래도 문숙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희진과 은희도 엄마가 죽을 것이란 건 상상도 안 했다.
조금 쉬고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문숙은 필요한 곳만 연락하고 나머지는 차단했다. 통원 치료를 계속했으나 상태는 더욱 악화됐고 2014년 2월에 입원했을 땐 이미 암이 전신에 퍼져 있었다. 처음엔 6인실로 들어갔는데 편안히 눕지도 못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한쪽 절제한 곳도 아물지 않았는데 다른 쪽 피부도 안 좋아지면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수시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지만 통증은 덜어지지 않았다.
통증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자세가 앞으로 쏟아져 편하게 앉아 있지도 못하고. 너무나 상태가 나빠 2인실로 옮겨 수혈을 받으면서 비로소 문숙이는 체념을 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던 엄마가 은희한테 주사약 선택을 의논하기도 하고 누구누구한테 돈을 부치라는 심부름도 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을 돌보느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딸아이가 가엾고 미안해 문숙은 휠체어를 타고 복도에 나가 있으면서 은희더러 침대에서 편히 자라고 야단을 했다. 휠체어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다리고 엉덩이고 짓무르고 욕창으로 성한 곳이 없는데. 그 지경이 됐는데도 저보고 침대에서 편히 자라고 야단을 하는 엄마한테 화가 나 은희는 밖으로 뛰쳐나가 희진이한테 당장 와서 엄마 간호하라고 악을 썼다고 한다.
거의 마지막. 1인실로 옮기고 나서 문숙은 은희에게 고모들한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죽기 하루 전. 너무 기가 막혀 정신이 나간 채로 달려온 시누들에게 들릴 듯 말 듯 너무 미안해서 알리지 못했다고, 불행하지 않았다고, 죽은 오빠한테도 고맙다고 했다.
고모들이 간 뒤 은희한테 "자자" 그리고 누워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2014년 4월 1일 만우절 밤이었다.
"아빠 때문에 주변에 너무 신세 져 자기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아마 엄마는 그래서 철저하게 숨겼을 거예요. 지금도 아빠 후원금 명단, 조의금 봉투까지 간직하고 있어요."
▲ 박문숙 추모일에 김병곤과 합장한 묘소를 다듬고 있는 민청련 동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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