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아내가 드디어 은퇴를 했다. 이제 우리 부부는 말 그대로 '은퇴 부부'가 되었다. 아내가 퇴직한 이후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아침이면 집 앞 공원 숲길을 함께 걷는다. 1시간 반쯤 걷다 보면 1만 2000보가 훌쩍 넘는다. 정해진 코스는 있지만, 출발 시간은 매번 다르다.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걷는, 자유로운 산책이 이제 우리의 루틴이 되었다. 며칠 전, 아내가 은퇴 후 하루 일과를 정리해 내게 말했다.
"아침은 9시까지는 자유롭게 일어나는 걸로 해요."
학교 다닐 때도, 직장 다닐 때도 늦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는 아내는 이제야 '늦잠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고 했다. 오전에는 산책, 오후에는 그림 그리기와 영어 회화 공부,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동네 한 바퀴 산책'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림을 시작한 건 지난 18일이었다. 유튜브를 참고하며 스케치북을 펼치더니, 오늘 완성된 첫 작품을 내게 보여주었다. 카카오톡에 올린 그림 사진을 본 큰아들이 "엄마, 야외 스케치 나가서 그린 거예요?"라며 놀라워했다. 사실 그림 도구 세트는 작은아들이 지난 '엄마의 날'에 선물해 준 것이다. 그동안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그 선물이 이제야 제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아내의 그림을 보며
▲ 아내가 완성한 첫 그림, 자연의 풍경을 담은 따뜻한 수채화 한 장. 은퇴 후 첫 작품이라 더 의미 있다 |
ⓒ 김종섭 |
▲ 작은아들이 선물한 그림 도구 세트, 몇 달 전 받은 선물이 이제 새로운 일상의 도구가 되었다 |
ⓒ 김종섭 |
아내가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 뒤로, 나는 문득 '나의 취미는 뭘까' 생각하게 되었다. 퇴직 후 거의 매일 도서관에 나가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글 외에는 계획이 비었다.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기타를 떠올렸다. 수없이 '이번엔 꼭 배우자' 다짐했지만, 늘 작심삼일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독학으로 천천히 손끝의 감각을 익혀보기로 했다. 코드를 잡을 때마다 손가락 끝이 시큰거리고, 음은 엇나가 삐걱거린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굳은살이 배길 때까지 해야지요"라며 웃는다.
하지만 시작 3일째가 되자 자신감이 흔들렸다. 통기타가 유행하던 청춘 시절, 친구들이 기타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청바지와 기타가 하나의 문화였던 시절. 그때처럼 멋지게 연주할 수 있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를 때'라는 말이 내게도 통할까? 마음 한구석에 그런 의문이 자꾸 생긴다.
그래도 포기하긴 이르다. 아내가 그림을 시작했듯, 나도 기타로 하루를 그려보려 한다.부부가 함께하는 취미는 아직 산책 뿐이지만, 언젠가 아내의 그림 옆에서 내 기타 선율이 흐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은퇴 후의 생활은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의 공백을 취미로 메꾸는 일이다. 돈보다 여유, 안정보다 의미를 좇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배워간다. 앞으로의 목표는 간단하다. 건강한 루틴을 지키며, 내 주변을 맴도는 '나만의 취미'를 만드는 일. 일로부터 벗어난 시간이지만, 인생의 또 다른 일터가 되어줄 그런 취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