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가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주말, 트랜스제주 2025가 막을 올렸다. 한라산 자락을 따라 수천 명의 러너들이 달렸고, 나는 그 길의 한쪽에 지역 봉사자로 서 있었다. 선수 중에 예전 회사에서 함께 일하며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온 지인이 있었다. 봉사자였던 나의 마음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 트랜스제주 2025 경기 종목. 올해 대회는 155km(100M), 100km, 70km, 20km 네 개의 코스로 구성되었다. |
ⓒ 트랜스제주 by UTMB |
제주의 길을 달리다 – 트랜스제주의 시작
트랜스제주(Trans Jeju)는 한라산과 오름, 숲길 등 제주 고유의 자연환경을 달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다. 2011년 첫 대회를 시작해 해마다 규모와 영향력을 키워왔으며, 2023년에는 세계적인 울트라 트레일 레이스 UTMB(Ultra Trail du Mont Blanc) 월드시리즈에 국내 최초로 가입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올해 열린 2025년 대회는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귀포·한라산·가시리·오름 일원에서 진행됐다. 역대 최대인 4900여 명의 선수와 44개국이 참가했으며, 코스는 155km(100마일), 100km, 70km, 20km 네 종목으로 운영되었다.
▲ 트랜스제주 2025 대회가 열린 제주월드컵경기장 모습. 선수 등록과 배번 배부가 진행되는 70K 천막 앞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를 띠었다. |
ⓒ 이현숙 |
함께 일하던 지인의 도전, 그리고 나의 응원
지인과 나는 예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다. 때로는 야근을 함께하고, 때로는 서울 남산 둘레길을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함께 여행도 다니며 웃고 울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나는 제주로 이주해 육아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살고 있고, 그녀는 어느새 트레일러닝 아마추어 선수로 변해 있었다.
지역봉사자로써 이 대회에 참여한 나는 70Km 대회 참여자들을 서포트 하는 천막에 배정받았다. 참가 선수들에게 배 번호표와 기념품을 배부하고, 간단한 행사 안내를 하는 역할이다. 이 곳에서 그녀를 마주친 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울컥했다.
"정말 대단하다, 언니!"
그 짧은 한마디에 지난 시간의 무게와 변화,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대회 당일 새벽, 그녀는 출발선에 섰다. 나는 집 근처 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의 출발을 떠올렸다. 대회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위치를 확인하자, 지도 위의 작은 점 하나가 천천히 코스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중간 체크포인트를 통과할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뛰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거세던 날씨였지만, 화면 속 이름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약 12시간 뒤, 완주를 알리는 표시가 떴다. 그제서야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 트랜스제주 2025 - 선수 실시간 위치 확인 가능. 100번은 넘게 이모의 위치를 묻는 조카의 모습. |
ⓒ 이현숙 |
완주의 눈물, 그리고 마음의 방향
오후가 저물 무렵, 결승선이 마련된 제주월드컵경기장에는 완주를 응원하러 온 가족과 지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그녀의 완주를 축하하러 달려갔다. 결승선을 통과한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울먹였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널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침 8시 출발해 오후 7시 반 도착까지, 11시간 30분 동안 걷고 달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모는 도대체 언제까지 달리기를 하느냐고 100번도 넘게 묻던 첫째 아이는 쑥스러워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감동'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참이 밀려왔다. 이건 단순한 경기의 완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의지, 그리고 회복의 여정이었다.
▲ 트랜스제주 2025 대회 당일 제주월드컵경기장 야외광장. 빛으로 물든 경기장 곳곳에서 대회의 열기와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 이현숙 |
완주 후, 그녀는 완주한 선수에게만 주어지는 돌하르방 모양의 미니 트로피와 완주 자켓을 내게 보여주었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나를 믿어 보았어."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땀에 젖은 얼굴과 눈가에 맺힌 눈물, 그리고 환한 미소가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트레일러닝은 단순히 산을 달리는 운동이 아니라, 나를 믿고 나의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달리며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고 있었고, 나는 봉사자의 자리에서 그 길을 마음으로 함께 걷고 있었다.
서로 다른 속도와 역할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트랜스제주 2025는 나에게 멈춰 있던 마음의 방향을 다시 세우게 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달렸던 길 위에서, 나도 내 안의 걸음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