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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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 즈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 성사 여부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2019년 6월 판문점 번개팅 이후 6년 4개월 만이 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도 북한과 대화하는 데 열려 있느냐'는 질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어떤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하는 것에 여전히 열려 있다"는 미국 백악관 관계자의 답변을 연합뉴스가 1일 보도했다. 김정은은 트럼프가 비핵화 요구를 내려놓으면 만날 의사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백악관은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할 뜻이 있다고 밝힌 셈이다. 다만 백악관 관계자는 "미국의 대북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덧붙였다.
김정은이 APEC 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북미 회동 성사 시 유력한 장소로 거론되는 곳이 바로 판문점이다. 다만 과거와는 양상이 달라졌다. 2019년 6월 판문점 회동은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이뤄졌지만,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하면서 군사분계선을 '국경선'으로 바꿔 불러온 김정은이 '국경선'을 넘어올 가능성은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가 깜짝 회동을 제안할 경우 김정은은 판문점 북측 지역으로 넘어와 달라고 요구할 공산이 크다.
막판까지 가봐야
이렇듯 김정은-트럼프의 '번개팅' 성사 여부는 짙은 안개 속에 있다. 트럼프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예단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2019년 6월 30일 번개팅도 그랬다. 당시 트럼프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거쳐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는 서울로 출발하기 직전인 6월 29일 오전에 "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그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트위터에 썼다. 바로 직전까지 미국 국무부는 북미 정상이 만날 계획이 없다고 밝혔던 만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다.
트럼프의 제안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린 김정은은 정식 외교문서를 요청했고, 트럼프는 "나는 6월 30일 오후에 디엠제트 근처에 있을 것인데, 군사분계선 남쪽 편에 있는 평화의집에서 오후 3시 30분에 만날 것을 제안한다"는 친서를 보냈다. 판문점 번개팅은 이렇게 성사되었는데, 트럼프 트윗부터 판문점 회동까지는 걸린 시간은 불과 30시간 정도였다.
이번에도 '깜짝쇼'가 연출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정상이 만남에 부정적이지 않고, 이재명 정부가 북미 정상 간 접촉을 희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하마스 종전이 큰 고비를 넘기고 있어 트럼프의 외교적 여력이 생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만남이 성사되면, 공식 회담보다는 사적인 대화의 자리가 될 전망이다. 언론의 헤드라인에 장식되는 걸 좋아하는 트럼프로서는 김정은과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또다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된다. 김정은으로서는 트럼프의 진위를 파악하고 싶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차원에선 한반도 비핵화를 여전히 목표로 삼고 있지만, 정작 트럼프 본인은 조선을 "핵보유국"이라고 칭하면서 세계의 핵 군축과 비핵화에 김정은도 참여하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만 해왔다. 이에 따라 김정은은 트럼프의 진의를 타진해 볼 필요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신사협정과 군비통제?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다시 강조한 가운데 9월 22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측 대성동 마을 태극기와 북측 기정동 마을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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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되었든, 다음 기회가 되었든,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나게 된다면 최대 관심사는 조선의 핵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 될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신사협정+군비통제'이다.
외교 용어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로 불리는 신사협정은 첨예한 갈등이나 이견이 존재하는 사안에 대해 명시적이고 구속력 있는 합의보다는 잠정적이고 암묵적인 합의나 이해를 통해 갈등 완화와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조선 핵 문제와 관련해 그 예고편은 지난 9월 초 북중정상회담에서 나온 바 있다. 이전까지 북중 관계는 조선의 핵 보유 인정 문제를 놓고 냉기가 흘렀었다. 그런데 이번엔 서로의 입장에 도전하지 않는 방향으로 절충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하는 조선의 입장을 문제 삼지 않고, 조선은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기로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트럼프 대화가 이뤄지면 흡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즉, 미국은 조선의 핵보유국 주장을 무시하고, 조선은 미국의 한반도 비핵화 원칙 고수를 무시하면서 '뜨거운 감자'를 식히는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두 정상이 이런 방향으로 타협한다면, 핵과 탄도미사일 동결 및 일부 감축과 한미동맹의 대북 태세 완화를 골자로 하는 군비통제, 대북 제재 완화, 한반도 평화협정과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이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조선 핵 문제에 대해 상상력과 선택지를 넓혀나갈 필요는 있다. 특히 "최악의 시나리오", "재앙" 등의 표현을 쓰면서 트럼프의 조선 핵 보유 묵인 가능성을 경계해 온 관성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신사협정+군비통제' 모델이 이것조차도 없는 미래에 비해 우리의 이익에 훨씬 이로울 뿐만 아니라, 이 모델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