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소년공'이 이 대통령에 전한 말 "국가 사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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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온 '당신의 이야기'] 수용시설 동명원 피해생존자 문호현씨의 두 가지 바람<국회에 온 '당신의 이야기'>는 사회적 갈등의 최전선이자 해법을 찾는 공간인 국회에서 생략되고 지워져 온 목소리에 주목합니다. 저마다의 이유를 품고 국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 국회 출입기자가 전합니다. <편집자말>

▲ '과거사법 개정' 촉구 회견 참석한 문호현씨 집단수용시설 동명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문호현씨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집단수용시설 피해생존인의 권리를 반영한 '과거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 남소연

'소년공 출신'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는 날, 또 다른 소년공 출신 한 남성은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았다. 기자 한 명 없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가 네 줄짜리 문장이 적힌 손팻말을 쥐고 햇빛을 받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그가 유일하게 입을 뗀 건 손팻말 문구를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로 외칠 때였다.

"국회는 집단 수용시설 / 진상규명을 강화하고 / 피해생존인의 권리를 반영한 / 과거사법 즉각 개정하라!"

구호를 제외하면 한마디 말도 없던 문호현(48)씨가 국회를 찾은 이유를 털어놓은 건 인근 카페로 장소를 옮긴 뒤였다. 25일 기자와 만난 그가 "1989년 9월쯤이었다"라며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아원 등을 전전하다 1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강제로 보내졌다는 '그곳', 목포역에서 도보로 20km 남짓 떨어진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그곳을 설명하기 위해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었다.

"거긴 고아원이 아니라 교도소예요. 완전히 삼청교육대라니까, 형제복지원이랑 똑같다니까."

바닷가 소년공, 그 고통의 증언

동명원.

1967년 전남 목포시 대성동 211번지의 '성덕부랑아보호소'로 시작해 1972년부터 운영돼 온 부랑아 수용시설. 아동을 대상으로 감금, 폭행·가혹행위, 강제노역 등 인권침해가 발생한 곳. 1967년부터 1983년까지 매 연말 기준 90명(평균 입소자 145명, 퇴소자 152명)을 수용했다고 법인 대장에 나오지만, 실제론 180명 이상을 수용한 것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판단한 그곳.

이후 전남 무안군 청계면으로 이전한 동명원은 1984년 현 위치인 청계면 복길리 산57 일대 부지(5959㎡·180만 2598평)에 시설을 신축했다. 1988년엔 시설장 둘째 아들이 무안군 삼향면 지산리 농공단지에 산업폐기물 포장재를 만드는 금호포리머 주식회사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동명원의 수익사업으로 활용됐다. 1989년 12월부터 1993년 3월까지 동명원 수용 아동 20여 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문씨의 증언은 다만 초점이 달랐다. 농공단지로 공장이 이전하기 전 동명원에서 2.7㎞ 떨어진 복길나루터(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556) 해변에 금호포리머로 불리는 공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금호산업' 간판을 달았다는 이 공장에 문씨의 고통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닷가에 금호포리머가 있었어. 거기서 3년을 일했지. 날마다 안 맞은 적이 없어. 겨울엔 영하 20도 바닷물에 들어가게 하는데 진짜 죽지. 그때 같이 일했던 20명 이름을 내가 지금도 다 기억하잖아."

2시간 넘는 증언이 이어졌다. 동명원으로 문씨와 함께 끌려갔다는 동생 문인현(44)과 그보다 4년 전 끌려갔다는 동료 이현주(52)가 옆에서 증언을 보탰다. 지난 4월 동명원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 결정서가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이현주는 신청인으로 진실규명 대상자, 문호현·문인현은 미신청인으로 참고인).

강제노역 3년, 세 번의 탈출

 집단수용시설 동명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문호현씨(가운데)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과거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뒤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현주, 문호현, 문인현씨다.
ⓒ 남소연

그 공장에선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다.

정면으로는 토끼섬(무안군 청계면)이, 왼쪽으로는 가란도·압해도(신안군 압해읍)가 있었다는 30여 년 전 기억을 문씨가 떠올렸다. 그는 1km 남짓 간격으로 모여 있는 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시늉을 하며 "공장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명원에 들어가고 몇 달 뒤 금호포리머로 보내진 문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감옥"이라고 되뇌었다. 구타당한 어린 시절의 참혹함과, 강제노역의 고단함과, 끝 모를 감금의 막막함을 되살리는 증언이었다. 하루는 고압 전류에 감전돼 공장 직조기(베틀)에 딸려 들어갈 뻔한 일이 있었다. 목포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돼 의식을 되찾았으나 피 검사만 받고 퇴원해 다음 날 다시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그때의 후유증이 20대 후반의 몸에 청각장애와 심장질환을 남겼다고 문씨는 기억했다.

"야간 반이면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일했지(12시간 2교대). 주간·야간으로 사람만 바뀌지 공장 일은 똑같아. 3톤짜리 직조기를 계속 돌리는 거예요. 하루 종일 80㎏짜리 쌀 포대 나일론 원단을 짜는 거야. 그걸 부산에 납품했었거든. 하루 할당량 못 채우면 책임자한테 뚜드려 맞는 거야."

겨우 10대 나이에 미처 헤아릴 수 없는 가혹행위들이 있었다. 콘크리트 타일 바닥에 내던져져 뒤통수를 부딪쳐 기절한 일,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동명원 자갈밭에서 포복한 일, '곡괭이 빠따'를 날마다 맞았던 일을 문씨는 하나하나 증언했다. 군대 가혹행위 '매미'를 묘사하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신 교육을 받으러 동명원에 있는 2층 창고로 가서 3시간 동안 창틀에 매달려 있었어. 그러다 떨어지면 곡괭이 빠따로 죽도록 맞으니까 떨어지지도 못하고. 기계가 고장나서 생산을 못해도 뚜드려 맞는 거야. 죽을 고비를 넘겨서 천만다행이지."

참혹했던 증언은 탈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세 번만의 탈출이었다. 야반도주로 이틀에 걸쳐 목포에 있는 파출소에 도착했지만 그는 가족이 아닌 동명원에 다시 넘겨졌고(첫 번째 탈출 실패), 무안 청계면에 있는 창고에 숨어 잠들었다가 한 남성의 신고로 또다시 동명원으로 보내졌다(두 번째 탈출 실패). 1993년엔 동료 두 명과 세 번째 탈출을 시도했다. 산속으로 들어가 군부대를 지나고 해안선을 따라 사흘 만에 해남에 도착했다. 몇 달 뒤 외할머니와 이모부를 통해 동명원에 여전히 수용돼 있던 동생 문인현씨를 데리고 나왔다.

형이 잠시 증언을 멈춘 사이 동생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밭에서 배고프게 농사짓고 있는데 외할머니랑 이모부가 찾아오신 그 순간엔 진짜 울었죠. 아, 이제 나가는구나."

"이재명 대통령도 소년공이잖아"

▲ '과거사법 개정' 촉구 회견 참석한 문호현씨 집단수용시설 동명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문호현씨(오른쪽 두 번째)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집단수용시설 피해생존인의 권리를 반영한 '과거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 남소연

지난 4월 진실화해위가 '목포 동명원 부랑아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이후 문씨와 동료들은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적극 응한다. 문씨는 동명원 피해생존자들을 모으기 위해 전화번호까지 공개했지만 아직 연락이 온 건 없다. '동명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를 맡은 그는 다른 피해생존자들과 지난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장을 접수했다.

그가 소송에 그치지 않고 국회를 찾은 이유는 나흘 전(8월 21일) 발의된 법안 때문이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피해생존인 중심주의 원칙'과 '집단 수용시설 인권침해 직권 전수조사' 등을 담은 이 개정안은 3기 진실화해위 출범을 앞두고 문씨와 같은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법안으로 평가받는다.

당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일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해당 개정안에 대해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영화숙·재생원 등 수많은 시설과 피해자가 존재했던 사건에 '집단 수용시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진상규명 대상으로 명문화했다. 또 국가가 직접 운영한 기관뿐만 아니라 민간 시설도 조사 대상으로 포함할 수 있도록 했다"라며 "이는 진실화해위가 수용시설 사건의 중요성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해당 개정안엔 '집단 수용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시설에 대해 시설별로 직권 전수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피해자가 고령과 장애로 고립돼 있고 정신병원이나 요양시설에 수용돼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진실규명 신청의 장벽이 매우 높다"라며 "정부의 역할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시설 피해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24~27일)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문씨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신과 같은 소년공 출신인 이 대통령에게 그는 국가 차원의 첫 사과를 바랐다. 그와 동료들은 2시간 넘는 증언을 마무리하며 국가가 나서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지금까지 사과한 대통령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당시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본인 잘못이 아니어도 국가를 대표해 사과해야 하는 거예요. 이재명 대통령 본인도 소년공이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삼청교육대처럼 동명원 사건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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