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 성수남씨가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자신의 흉터를 내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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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사는 성수남(75)씨는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 사태를 뉴스로 접하고 잠을 설쳤다. 자정을 넘긴 4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잠에 들었지만 1시간쯤 지나 다시 눈을 떴다.
"그날도 학생들이 나타난 꿈을 꿨어."
그가 말한 '학생들'은 5.18민주화운동 때 만난 이들이다. 당시 서른 살 청년이었던 성씨는 다친 시민들의 응급처치를 돕기 위해 붕대와 가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들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당시 성씨는 늦은 밤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했다. 괴로움에 들고 갔던 가위로 오른쪽 위 가슴을 찔렀다. 상처를 봉합한 이후에도 계속 "사명"처럼 여기던 일들을 멈추지 않았다. 총알 파편이 온몸에 박히기도 했다. 구타를 당해 자궁을 적출하기도 했다.
그는 5.18 성폭력 피해자다.
2024년 다시 등장한 계엄으로 트라우마가 꿈틀댔다. 꿈에서도 죽은 학생들이 아른거렸다. 성씨는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그날 새벽, 44년 전처럼 다시 금남로로 향했다. '가는 길이 무섭지는 않았냐'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그러니까(무서우니까) 나갔지"라고 답했다.
"우리는 당해봤잖아. 보고 느껴봤잖아. (이번 비상계엄 직후) 새벽에 (옛) 전남도청 주변을 뺑뺑 돌았지. 가서 본께 옴메. 시민들이 많이 나왔더라고. 너무 감사한 거여."
12·12에 시작하는 국가와의 싸움
▲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인 성수남씨(오른쪽)가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자신의 흉터를 내보이고 있다. 그 옆은 열매 대표 김복희씨(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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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내란은 6시간 만에 끝났지만, 성씨는 더 이상 국가 폭력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 국가가 과거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이 피해를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는 성씨만의 바람이 아니다. 지난 여름엔 뜻을 함께하는 다른 5.18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열매'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들은,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시작한다.
성씨를 포함한 열매 회원들이 지난 5일 오후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 모였다. 지난 9월 30일 다 함께 국회의사당을 찾아 각자의 피해를 증언한 이후 가진 첫 공식 모임이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최근 있었던 내란 사태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들이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만났다. 이들은 12일 국가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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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의 소송을 대리하는 하주희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을 향해 "피해를 회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며 "하나는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입었던 손해를 보상과 배상을 통해 인정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국가폭력으로 인해 겪은 44년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집단손해배상 소송을 12일 시작하기로 했다. 하 변호사는 "이날은 내란이 시작된 날이자, 열매 회원들이 겪었던 피해의 기원이 된 날"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45년 전 '12월 12일'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벌인 날이다. 이후 반발한 광주·전남 지역 시민들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자 신군부는 유혈진압에 나섰다.
싸움의 의미 "존엄"
▲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인 김선옥씨가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다른 참석자에게 선물을 받고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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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변호사가 설명을 마치자 열매 회원들은 저마다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 피해자는 "우리가 겪은 일도 힘든데 소송을 시작한다는 자체로도 힘이 많이 든다"라며 "심지어 우리가 (소송 등을 통해) 노력해야 배상을 해준다니..."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피해자 김선옥씨는 "국가가 얼마를 배상하든 우리 일생이 회복되겠는가"라며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가 이긴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라고 서로에게 위로를 전했다.
하 변호사 역시 "국가가 여러분에게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받는 순간, 피해자로서뿐만 아니라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는 의미가 있다"라며 다독였다.
▲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이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해 주고받은 선물을 열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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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말미 참석자들은 둘씩 마주 보고 앉아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울었다. 장갑과 목도리, 오르골 등을 선물로 주고받기도 했다. 이어 기억해야 할 10개의 순간이 담긴 피켓을 들고 기념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열매의 올해 마지막 모임이 끝이 났다.
이들은 44년 만에 서로를 처음 만난 봄, 열매라는 이름의 모임을 결성한 여름, 처음 국민 앞에서 피해를 증언한 가을을 지나, 겨울 앞에 섰다. 열매는 이제 국가와 싸움을 시작한다.
[봄] 5·18조사위 "조사결과보고서 이달 29일 공개" https://omn.kr/27ige
[여름] 나는 35번, 아니 '5·18 성폭력 증언자' 대표 김복희 https://omn.kr/2a0li
[가을] "44년 전, 아니 44년째 고통" 증언에 모두 울었다 https://omn.kr/2adgd
▲ 5.18 성폭력 피해 모임 '열매'의 회원들이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만났다. 이들은 12일 국가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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