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질병’ 아닌 ‘다름’으로 바라보는 캐나다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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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메재단의 같이 살기] ‘고쳐야 할 존재’ 아닌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지원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비영리재단 ‘푸르메재단’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 밴쿠버를 찾았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2025년 초여름 목격한 캐나다 장애인의 ‘보통의 삶’을 전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캐나다 비영리단체 ‘오티즘(Autism) BC’의 직원들. 오티즘 BC는 자폐 당사자 등으로 구성된 직원 13명이 회원 1만1000명을 지원하고 있다. 오티즘 BC 제공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포트무디에 자리한 구글 지도 리뷰 1042개, 평점 4.5점(10월 13일 기준)의 파이 가게. 파이 굽는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가비 앤드 줄스(Gabi & Jules)’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은 이곳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오티즘(Autism) BC’의 전무이사 수잰 퍼로를 만났다. 퍼로 전무이사는 왜 사무실이 아닌 파이 가게로 조사단을 불렀을까. 가비 앤드 줄스는 단순한 파이 가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티즘 BC의 지원으로 희망을 찾은 한 자폐 자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다. 가비 앤드 줄스 직원의 35%는 장애인이다.

자폐인을 사회에 맞게 ‘고치는’ 것 목표 아냐
“우리 역할은 부모가 자폐 자녀를 ‘고쳐서’ 사회에 맞추도록 돕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부끄러움을 경험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우리 역할이죠.”

퍼로 전무이사는 오티즘 BC가 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75년 설립돼 올해 50주년을 맞은 오티즘 BC의 운영 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신경 다양성 긍정(neuro-affirmative)’. 자폐를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의료적 결함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다.

놀랍게도 오티즘 BC는 직원 13명이 1만1000명 넘는 회원을 지원하고 있다. 더구나 직원의 98%가 자폐인이거나 학습장애, 인지기능장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 또는 장애인의 가족이다. 이는 의도적인 채용 정책 결과가 아니라, 신경 다양성을 긍정하는 단체의 철학이 만들어낸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한다. 퍼로 전무이사는 “누군가에게는 약점이나 결핍으로 보일지 모를 직원들의 ‘살아 있는 경험(lived experience)’ 덕분에 오티즘 BC는 장애인들이 두려움 없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된다”고 설명했다.

상상해보자. 자녀의 자폐 진단을 받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빠진 부모 마음을. 마구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도 자폐 자녀를 키우고 있어요. 얼마나 힘드신지 알아요.”

또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성인 자폐인이 상담을 요청해올 때 “저도 자폐인이라 그 마음을 잘 알아요. 우리는 틀린 게 아니에요. 다를 뿐이에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그 순간 오티즘 BC가 제공하는 ‘복지’는 일방적인 시혜나 지원이 아닌, 깊은 공감과 따뜻한 연결이 된다.

오티즘 BC는 모든 직원이 원격으로 근무하는 ‘완전한 원격근무’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사무실도 없다. 퍼로 전무이사는 “이러한 운영 방식은 신경 다양성을 가진 직원들이 자기 컨디션에 맞춰 최고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많은 자폐인이 대면 소통 과정에서 큰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직원과 지원받는 자폐 당사자를 모두 배려한 것이다. 자녀 양육 부담이 큰 직원들의 번아웃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복지제도이기도 하다.

오티즘 BC가 6~16세 자폐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포켓몬스터 클럽’. 오티즘 BC 제공
자폐인을 ‘포켓몬스터 클럽’과 연결해 고립 해소
오티즘 BC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보 허브’다. 지역 코디네이터 4명이 한 달에 200건 넘는 정보 요청을 처리한다. 막 자폐 진단을 받은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 기관을 연결해주고, 부모에게는 학교 등에서 자폐 자녀의 권리를 스스로 옹호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특정 치료법을 강요하는 대신, 회원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정을 지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오티즘 BC의 철칙이다. 회원들에게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클럽과 유명 게임 ‘마인크래프트’ 모임, 각자 다른 음악을 들으며 함께 춤추는 ‘사일런트(silent) 댄스 파티’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 고립되기 쉬운 자폐 당사자를 창의적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해주는 것이다.

오티즘 BC는 상징적인 옹호 활동으로 세상에 말을 건다. 이들은 오랫동안 자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파란색과 퍼즐 조각 사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파란색은 자폐를 질병으로 여겨 치료 대상으로 보는 이념을 강조하며, 퍼즐 조각은 자폐 당사자를 ‘전체 그림에 맞춰야 할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 대신 오티즘 BC는 자폐인 커뮤니티가 온라인 투표를 통해 스스로 선택한 빨간색과 금색을 새로운 상징으로 내걸었다. ‘레드 인스테드(red instead)’ 캠페인이다. 상징물을 결정할 때도 자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한 것이다. 자폐 당사자들의 힘으로 세상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오티즘 BC의 활동 방식이 잘 드러난 사례다. 오티즘 BC는 4월 단체 설립 50주년을 맞아 캐나다 랜드마크인 ‘사이언스 월드’ ‘밴쿠버컨벤션센터’ ‘버나비 시청’ ‘밴쿠버 시청’ 건물을 빨간색과 금색 조명으로 물들이기도 했다.

오티즘 BC가 4월 ‘레드 인스테드’ 캠페인 일환으로 캐나다 밴쿠버 ‘사이언스 월드’ 건물에 빨간색과 금색 조명을 밝혔다. 오티즘 BC 제공
장애인 복지 가로막는 한국 ‘장애인 등록’
한국 정부의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 등록증’이라는 단단한 벽 안에서만 제공된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 서비스를 받으려면 반드시 장애인 등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에서 장애인 등록증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 대비 5.1%에 불과하다. 등록 비율 자체가 낮은 만큼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반면 캐나다의 장애인 등록 비율은 2022년 기준 15세 이상 국민의 27%나 된다. 정신장애부터 알코올 중독까지 다양한 장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폭넓게 지원하는 것이다. 오티즘 BC는 여기에 더해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경계선 위 사람들’, 즉 장애 진단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개인이나 가족을 대상으로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오티즘 BC는 한국 복지 시스템의 두 가지 문제점을 상기케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장애를 ‘극복’과 ‘치료’ 대상으로 볼 것인가. 장애인 등록 기준에 들지 못해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수많은 경계선 위 사람들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길은 지난할 것이다. 하지만 장애 자녀를 둔 부모가 더는 ‘부족한 부모’라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장애 당사자들이 ‘고쳐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이제는 우리도 낯선 대안을 마주해야 한다. 자폐를 ‘문제’가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면서 장애 당사자를 ‘고치는’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삶을 ‘지지하는’ 지원 체계를 구상할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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