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업자 A 씨는 8월 공립 어린이집에서 도배를 의뢰하는 전화를 받았다. 콜센터 상담직원처럼 어색한 말투가 수상쩍긴 했지만, 이름 있는 시설이라 큰 의심 없이 응대했다. 평형과 높이에 맞는 견적을 주고받은 직후 고객은 서둘러 방문 일정을 잡자며 가계약서를 보냈다. 서류에는 고객 정보는 하나도 없이 A 씨 이름만 적혀 있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공립 어린이집이라 내부 품의를 빠르게 올려야 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고객은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어린이집에 제세동기를 설치해야 하는데 단가가 너무 높다며 A 씨가 업체에 가격을 한번 확인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반복된 요청에 A 씨는 결국 제세동기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소비자 가격은 330만 원, 당일 오후까지 선입금을 하면 300만 원에 공급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객은 그럼 A 씨가 직접 구매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A 씨가 이를 거절하자 고객은 전화를 끊었고, 이후 A 씨는 약속된 날짜에 어린이집 주소로 찾아갔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끝내 받지 않았다.
A 씨처럼 정교하게 설계된 사기 수법에 속는 것이 더는 드문 일이 아니다. 지난해 국내 범죄 피해자 3명 중 1명은 사기 피해자(66만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피해자 175만 명 중 66만 명이 사기 피해자였다. 피해액도 압도적이다. 전체 범죄 피해액 약 36조 원 중 사기 피해액은 27조7602억 원으로 77%를 차지했다.
범죄 방식도 변화했다. 개인의 거짓말과 공갈 수준을 넘어 체계적·조직적으로 사기를 치는 사례가 늘어났다. 지난해 공범이 11명 이상인 사기 사건은 2383건으로, 2022년(925건)보다 2.6배 증가했다. 이에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방식 대신,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표적화된 맞춤형 사기도 늘고 있는 추세다. A 씨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은 자영업자를 여럿 봤다고 했다. 실제 자영업자 커뮤니티에는 유사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지방교도소 교정국을 사칭해 교도관 숙소에 쓸 에어컨 견적을 요청한 뒤 무전기 구매를 부탁하거나, 방검복을 납품해달라고 접근해 배터리 견적을 대신 알아봐달라는 식이다.
사기 범죄는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동원하며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확보한 사진이나 영상을 바탕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위조하는 딥페이크(deepfake)·딥보이스 기술도 보이스피싱에 활용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무심코 받았다가 목소리가 도용될 수 있다는 경고 글이 올라와 주목받았다. 발신자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 상대방이 “여보세요” 한 마디를 하면 이를 녹음해 AI로 복제한 뒤 보이스피싱에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경찰관 남편을 둔 B 씨도 아들이 납치됐다는 보이스피싱에 속았다. 상대는 울먹이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돈을 보내야 풀어주겠다고 협박했다. 마침 아들이 해외여행 중인 터라 실제 납치로 오해한 B 씨는 약 1000만 원을 송금했다. 돈은 끝내 되찾지 못했다.
범죄자가 사기를 여러 건 저질렀어도 경합범 규정에 따라 가장 무거운 형량의 절반만 추가되기 때문에 처벌 수위가 제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법정 최고형이 징역 10년인 사기죄를 여러 건 저질러도 최종 형량은 최대 15년에 그치는 것이다. 7월 무자본 갭투자로 약 760억 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수원 전세사기 일가족’의 주범은 항소심에서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공범인 아내와 아들에게는 각각 징역 6년과 4년이 선고됐다.
피해 회복은 고스란히 피해자 몫이다. 사기 피의자는 피해금을 변제할 법적 의무가 없다. 피해자가 돈을 돌려받으려면 민사소송을 따로 제기해야 한다. 2023년 기준 사기 피해금 회수율은 5%에 불과했다. 사기범은 재범률도 높다. 대검찰청 범죄 분석에 따르면 2022년 검거된 사기 범죄자 17만6623명 중 재범자 비율은 41.3%(7만2997명)에 달했다. 재범자의 45.5%(3만3205명)는 또 사기 범죄를 저지른 동종 재범자였다. 동종 재범자 비율은 2019년 39%, 2020년 40.1%, 2021년 42.4% 등으로 증가 추세다.
전문가들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에서 사기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1세대 프로파일러인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기 범죄는 강도나 살인 등 강력범죄와 달리 피해자에게 물리적 상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수익은 큰 편이라 효율성이 높은 범죄로 분류된다”며 “범죄 수법은 점점 다각화·고도화되고 있지만, 처벌은 여전히 미미해 형량 강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