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수십 년 동안 무역적자를 겪었는데, 무역적자가 비정상적·이례적 위협이 될 수 있나.”
미국 워싱턴DC 연방순회항소법원에서 7월 31일(이하 현지 시간) 열린 재판에서 판사들이 연방정부를 대리하는 법무 차관보를 향해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냈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법원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백악관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가 시작한 ‘관세 전쟁’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원고 중 하나인 주류 수입업체 이름을 따 ‘VOS 셀렉션 대 트럼프’ 사건으로 불리는 재판이다.
최근 미국 각지 법원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관세의 위헌·위법성을 다투는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이 중 ‘VOS 셀렉션 대 트럼프’ 사건 재판 진행이 가장 빨라 일종의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항소법원 공식 사이트에 게시된 첫 재판 요지에는 판사들이 연방정부 측을 질타하는 발언이 고스란히 담겼다. 현재 종신직인 항소법원 판사 11명 중 8명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해 임명됐다. 이번 항소심 결과가 이르면 9월에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항소심 쟁점은 미국 대통령이 IEEPA에 근거해 관세를 부과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다. 앞서 국제무역법원은 관세 부과는 기본적으로 의회 권한이며, 대통령이 IEEPA에 따라 관세율을 무제한 매겨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관세 전쟁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IEEPA와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IEEPA는 대통령에게 국가안보와 직결된 ‘비상사태’에 한해 대내외 경제 규제를 가할 권한을 규정한 법이다. 그간 미국이 러시아, 이란, 북한, 알카에다 등 적대 세력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할 때 근거법으로 쓰였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대규모 무역적자를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세계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IEEPA가 관세 부과 근거로 쓰인 것은 1977년 법 제정 이후 최초다.
미국 사법부 판결로 트럼프 대통령이 패소할 경우 IEEPA를 근거로 한 상호관세의 운명은 불투명해진다. 항소법원이 원고 측 손을 들어주면 당장 IEEPA에 따른 행정명령으로 캐나다와 멕시코에 부과된 관세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관세를 부과받은 기업들이 미국에 환급을 요구할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IEEPA 관련 재판을 염두에 둔 듯 한국, 일본, 유럽연합과의 상호관세 협상 결과를 담은 행정명령에 ‘Severability(분리 가능성)’ 조항을 신설했다. 해당 행정명령의 특정 조항이 무효가 되더라도 나머지 조항은 유효하다는 게 뼈대다.
다만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 주장은 경제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의 관세 수입은 올해 7월 280억 달러(약 39조2000억 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관세 인상 전 100억 달러(약 14조 원)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37조 달러(약 5경1700조 원)에 달하는 미 정부부채 규모를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에 대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을 지낸 김흥종 고려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보기에 불공정한 세계경제 질서를 뜯어고치는 일종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혁명을 꿈꾸는데, 여기서 관세는 다른 나라 시장을 개방하게 하는 일종의 ‘레버리지’ 수단”이라며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경제팀은 앞으로도 관세 인상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