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분홍 막대기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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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동물원에 갇힌 너희를 본 적 있었지. 뻥 뚫린 하늘에서 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어. 정말 막대기 같더라. 날개 달아놓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분홍빛 막대기. 너희는 크롭밀크라 불리는 피처럼 붉은 젖으로 아기들을 키운다지. 입에서 입으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더라. 다쳐서 흘리는 아픈 피가 아닌 것 같더라. 2025년 프랑스 아를의 카마르그국립공원.


“아직 못 보셨어요? 기다란 막대기들이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머무는 동안 한 번은 꼭 보게 될 거예요. 그거 보면 ‘정말로 막대기가 하늘을 날아가네’ 하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웃겨요. 핑크색 막대기들이 아무 표정 없이 쓰윽 지나간다니까요. 머리 위 직각으로 올려다볼 때가 제일 재밌어요. 그거 꼭 보셔야 해요.”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색이었다. 햇볕이 뜨거웠지만, 습도가 낮은 덕인지 그늘은 선선했다. 어쩌다 일 때문에 프랑스 남부 아를에 며칠 머물 때였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가 병마와 싸워가며 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곳, 스스로 귀를 자르고 붕대 감은 자화상을 그렸던 고장, 해바라기가 끝없이 피어 있다는 아를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우연히 내 학교 후배라고 주장하는 분을 만나 이른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가족과 아를에 살고 있었다. 길 위에 식탁을 내놓은 식당에서 술 한잔 곁들이며 밥을 먹다가 그가 느닷없이 분홍색 막대기가 날아가는 걸 봤냐고 물었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농담을 하는 걸까 싶어 피식 웃다가 고개를 쳐들었는데,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냥 비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정말이었다. 분홍색 막대기들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표정도 표정이라면, 그들에겐 표정이 있었다.

“플라밍고입니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시골로 나가면 플라밍고 집단서식지가 있어요. 버스 타고 가기엔 쉽지 않을 텐데, 택시는 너무 비쌀 테고. 그래도 가보시면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정말 웃기지 않아요? 저 녀석들 날아가는 모습이.”

밥 먹는 내내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으나, 막대기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발동 걸린 마음을 어찌할 텐가. 이튿날, 못 찾아가면 되돌아온다는 심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택시를 타기엔 너무 멀었다, 너무 비쌌다.

아뿔싸, 허허벌판에 내렸다. 한 정거장을 지나친 거였다. 걸었다. 시골의 한 정거장은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로 길었다. 마냥 걷다보니 소박한 카마르그국립공원 입구가 나타났다. 들어가자 바다로 이어지는 드넓은 습지가 펼쳐졌다.

분홍빛 막대기들이 갯물에 머리를 처박은 채 먹이를 찾고, 여기저기서 날아올랐다. 저 인공적으로 보이는 기묘한 분홍색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하물며 노란 눈알은 플라스틱 단추를 붙인 것만 같지 않은가. 누군가 “저건 가짜 새입니다”라고 말해도 믿었을지 모른다. 불현듯 날아가는 플라밍고와 열정의 춤 플라멩코는 아무 관계가 없을까 궁금함이 일었다. 그러면 그렇지, 같은 어원이었다. 불꽃처럼 붉은 깃털이란 뜻의 스페인어 flamenco!

생김새를 보면 두루미나 황새의 친척일 것 같은데, 뜻밖에도 논병아리와 가깝다. 붉은 깃털은 먹이가 준 선물이다. 시몽키라 불리는 작은 벌레 아르테미아가 저토록 눈길 붙드는 색을 만들어준다고. 멸종위기 1급 동물이다.

내가 고흐였다면, 플라밍고도 그렸으련만. 불행히도 다행히도 나는 고흐가 아니었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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