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정부가 차관 지원을 거부한 필리핀의 7천억원 규모 토목 사업에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압력을 행사해 지원이 재개됐다는 한겨레21의 단독 탐사보도(제1580호 참조)를 인용하며 “해당 사업에 대해 즉시 절차를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고 2025년 9월9일 밝혔다. 그러자 권 의원은 “필리핀의 민생 프로젝트”라며 “국회의원 개인이 이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단독] 권성동, 세 차례 압박에 “필리핀 사업 EDCF 지원 곤란” 판정 뒤집혔다’는 제목의 한겨레21 기사 링크를 공유한 뒤 “부정부패 소지가 있는 부실사업으로 판정된 해당 사업에 대해 즉시 절차 중지를 명령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업이 아직 착수되지 않은 단계여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지원 등의 사업비는 지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며 “자그마치 7천억원 규모의 혈세를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고, 부실과 부패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한겨레21 보도를 두고 “언론은 권력의 감시자이자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같은 존재로, 공정한 세상을 이루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며 “이번 탐사보도를 통해 진실을 널리 알리며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주신 언론의 용기와 노력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앞서 한겨레21은 제1580호 표지이야기에서 부정부패와 부실사업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정부가 EDCF 차관 지원을 거부한 7천억원 규모의 필리핀 토목 사업이 권 의원의 압력에 의해 차관 지원 재개로 결정이 뒤집혔다는 의혹을 탐사해 단독 보도했다. 보도를 보면,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 농촌 350곳에 ‘모듈형 다리’를 설치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자 2023년 11월 한국 정부에 초저리의 EDCF 차관 4억3900만달러(약 6117억원)를 요청했다. 기획재정부가 이 사업을 수개월 검토했지만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 너무 많고 △부정부패 전력이 있는 필리핀 현지 기업이 참여하며 △한국 기업들의 참여 의사가 저조했다는 등의 이유로 2024년 2월 “지원 불가” 결론을 내고, 같은 해 4월 필리핀 정부에 공식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권 의원이 2024년 2월부터 5월까지 세 차례 이상 최상목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접촉하거나 기재부 관계자들을 의원실로 불러 사업을 진행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권 의원은 이 과정에서 “필리핀 정부로부터 니켈 광산 채굴권을 확보할 수 있다” “대우건설과 삼부토건 등이 참여 의향이 있다”고 말했고, EDCF를 운용하는 한국수출입은행 관계자들이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에게 ‘외교 결례’를 범했다는 주장까지 하며 사실상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을 협박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 의원은 9월9일 오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야당 탄압에도 넘지 말아야 한 선이 있다. 바로 국익과 국가 간 외교 관계”라며 “EDCF는 단순한 차관이 아니라, 개발도상국과의 신뢰를 쌓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전략적 자산이다. 따라서 기금 신청국의 요청을 가능한 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권 의원은 이어 “이 대통령이 지적한 사업은 정식 명칭이 PBBM(President Bongbong Marcos Jr.)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으로, 필리핀 대통령의 이름까지 붙인 최핵심 국책사업이다. 농촌 접근성을 개선하고 낙후 지역의 농산물 유통망을 확보하기 위한 민생 프로젝트”라며 “한국수출입은행 필리핀 사무소가 ‘이런 사업은 일본한테나 가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막대한 혈세를 투입하고도 외교적 신뢰를 잃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느냐”라고 덧붙였다. 한겨레21이 보도한 대로 권 의원이 수출입은행 관계자들의 ‘외교적 결례’를 이유로 압박을 가했던 일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권 의원은 결과적으로 이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고 타당성조사가 진행됐을 뿐이라고도 주장했다. 권 의원은 “이 대통령은 마치 7천억원을 지켜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는 행정의 기본조차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것일 뿐”이라며 “2024년 10월 발주된 것은 ‘사업타당성조사’다. 이는 모든 공적개발원조 사업에서 본격 심사와 승인 전에 거치는 표준 절차일 뿐, 차관 지원이나 자금 집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업비는 집행되지 않았으며, 타당성조사가 곧 사업 승인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권 의원은 그러면서 “사업타당성조사는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이 독립적으로 심사·승인 권한을 갖고 있으며, 국회의원 개인이 이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권 의원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이 나온다. 타당성조사 발주에도 17억원가량의 국세가 지출되고, 이미 진행 가능성이 큰 사업 위주로 타당성조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필리핀 농촌 모듈형 사업도 이 대통령의 사업 중지 명령이 없었으면 실제 사업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EDCF 전문가는 “타당성조사에도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의 심사가 끝난 사업들만 타당성조사를 실시한다”며 “타당성조사가 발주된 사업 90% 이상은 (차관이) 집행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통일교 쪽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9월11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된 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은 재석 의원 177명 가운데 찬성 173명, 반대 1명, 기권 1명, 무효 2명으로 통과됐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불참했으나 권 의원 본인은 투표에 참여했다.
현직 국회의원은 회기 중 불체포특권이 있어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다. 앞서 권 의원은 불체포특권 포기 의사를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