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대기업 현대로템의 국외 철도 사업에 이례적인 집중 지원을 하면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이 부족해져, 다른 국외 원조 사업에 차질이 생긴 것으로 확인됐다. 윤석열 정부가 2025년 한 해 EDCF 전체 집행액 2조2천억원가량과 맞먹는 2조2027억원을 현대로템의 단 한 사업에 ‘몰빵’ 지원했기 때문이다.
한겨레21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수출입은행은 이미 집행을 앞둔 EDCF 사업 관계자와 컨설턴트 일부에게 “선수금을 줄이라”거나 “지출을 늦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 해에 쓸 수 있는 EDCF 예산보다 써야 할 지출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수출입은행이 2025년 2월 발표한 ‘2025~2027년 EDCF 중기운용방향’을 보면, 수출입은행은 2025년 한 해 EDCF 집행 수요를 약 2조2천억원으로 추산했는데, 이 금액은 같은 해 전체 예산을 초과하는 규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수출입은행은 다른 국외 EDCF 사업들의 선수금을 줄이고 집행 시기를 늦춰, EDCF 지출을 줄이는 조처를 계획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수출입은행은 에티오피아 아다마 과학기술대학 연구센터 건립사업 본구매 선수금을 30%에서 15%로 낮췄고, 튀니지 토지정보시스템 구축사업의 선수금도 20%에서 15%로 줄였다. 또 2025년에 집행해야 하는 일부 차관은 아예 2026년으로 집행을 미룰 계획도 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각종 국외 원조 차관 사업을 연기하고 줄이는 데는 2025년 윤석열 정부가 현대로템의 모로코 전동차 사업에 대규모 EDCF 차관을 지원한 영향이 크다. 정부가 EDCF 차관을 모로코 정부에 초저리(상환 기간 40년, 이자율 연 0.05%)로 2조2027억원을 빌려주기로 함에 따라, 현대로템은 국제 경쟁 입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결국 모로코 전동차 사업을 따냈다. 수주 소식이 알려진 뒤 4개월 만에 현대로템의 주가는 120%이상 급등해 창사 이후 최고가를 경신했다.(제1568호 참조)
현대로템의 주가는 올라갔지만, EDCF 기금은 말라붙었다. 현대로템의 모로코 전동차 사업을 위해 집행된 총 EDCF 기금 2조2027억원은, 한 해 한국 정부가 지출하는 EDCF 전체 집행액(2023년 1조5151억원, 2024년 2조192억원)보다 크다. 모로코에 집행되는 차관이 분할 지급되긴 하지만, 총액(2조2027억원)이 크다보니 총액의 10%밖에 되지 않는 선수금도 2200억원 이상이나 된다. 이는 2025년 하반기에 집행이 예정된 EDCF 수요 항목 가운데서도 가장 큰 금액으로 알려졌다. 현대로템의 또 다른 EDCF 사업인 ‘카이로 메트로 2·3호선 전동차 구매 사업’에도 2025년 수백억원이 집행될 예정이다.
현대로템의 모로코 전동차 사업에 역대급 EDCF가 지원되면서 그 나비효과로 한국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한 EDCF 사업 관계자는 “선수금은 현장 세팅, 기자재 구매 등 사업수행을 위해 사용돼야 할 자금”이라며 “계약자인 대기업은 선수금이 줄어들어도 재무상 문제가 없겠지만, 하도급사들은 금융권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사업수행 준비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하도급으로 참여하는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선수금을 줄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금융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신문고에도 이러한 내용의 민원이 접수됐다. 한 국외 사업 관계자는 최근 “수출입은행이 갑자기 선수금 비율을 조정시키고 있으며, 컨설턴트들에게 선수금 비율을 10% 수준으로 낮춰 입찰서류를 작성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중소기업들에는 선수금 몇천만원, 몇억원이 목숨과도 같다. 입찰서류에 따라 견적을 냈는데, 계약 체결시 대금 지급 조건을 수출입은행이 마음대로 변경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내용의 민원을 올렸다.
수출입은행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EDCF 차관을 받는 수원국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수출입은행은 “선수금 비율을 포함한 대금 지급 조건은 수원국 사업실시기관과 우리 기업 간 합의를 통해 일부 조정될 수 있으며, 수출입은행이 계약 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수원국이 준수해야 하는 EDCF 가이드라인에는 수출입은행의 입찰서류, 입찰평가보고서 및 계약서 승인 권한이 명시돼 있다. 게다가 한겨레21의 취재를 통해 수출입은행이 계획을 세우고 기업과 컨설턴트를 압박해 선수금 조정 등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현대로템은 특히나 ‘명태균 게이트’의 주인공 명태균씨를 통해 정부에 로비해 사업을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기업이다. 한겨레21은 현대로템이 윤석열 정부 초기 고속철도 케이티엑스(KTX)와 에스알티(SRT)의 차량 제작·정비 사업 경쟁입찰을 앞두고 명태균씨를 통해 정부에 로비한 뒤 1조7960억원 규모의 사업 두 건을 수주한 것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정황을 보도한 바 있다. 수출입은행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수출입은행은 통일교, 윤석열 부부와 연루돼 압수수색까지 받았지만, 캄보디아 EDCF 사업에는 돈이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며 “오히려 이미 선수금까지 지급된 현대로템의 모로코 철도 사업에 문제가 있었을까봐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현대로템에 EDCF가 추가 지원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한 EDCF 업계 관계자는 “현재 타당성조사가 진행되는 방글라데시 다카 메트로 4호선 건설 사업(15억달러, 약 2조900억원 규모) 등에 입찰하려는 현대로템에 추가 EDCF가 지원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최근 착공에 들어간 승인 사업이 많아져서 기성금 수요가 늘어나 예산 관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선수금율이 높은 사례가 있어서 통상적인 수준으로 조정하는 과정”이라며 “결국 최종 계약 조건은 수원국과 기업이 정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기재부 쪽은 한겨레21의 질의에 답변을 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