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체육지도사인 김예린(33)씨는 대학 또는 실업팀에서 은퇴한 여자축구 선수 8명을 2019년에 만나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8명의 평균 선수 경력은 10년이고 모두 20대였다. 그중엔 유소년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고,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을 받아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이미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예린씨가 은퇴선수들의 고민과 사회 적응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심층 면담한 사람들이다. 예린씨는 이를 바탕으로 ‘여자축구선수의 탈사회화와 사회적응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예린씨가 확인한 ‘탈사회화’(은퇴)의 원인은 다양했다. 선수들은 갑작스러운 소속팀 해체, 가는 길이 한없이 좁은 실업팀 또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한 능력의 부재(경기력 부족), 지도자와의 부조화, 선수 생활 유지에 필요한 비용 부담으로 은퇴하거나 은퇴를 당했다. 중3 때부터 전문 축구선수로 뛴 예린씨도 대학 진학 뒤 실업팀에 입단했지만, 팀 해체로 어쩔 수 없이 은퇴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확인된 선수들의 가장 큰 은퇴 이유는 여자축구 선수 미래의 불확실성, 즉 ‘불투명한 비전’이었다.
“은퇴하게 된 게, 멀리 봤을 때 앞으로 여자축구에 대한 비전이 없는 것 같고,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만 하다보니 다른 게 너무 하고 싶어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선수 경력 12년의 ㄱ씨)
“부상도 있었고, 계속 축구를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축구는 앞으로 나아가는 비전 자체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그만두고 다른 진로를 선택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퇴를 한 것 같아요.”(선수 경력 7년의 ㄴ씨)
“또 다른 목표가 생겨서 은퇴했어요. 저는 축구를 정말 좋아했지만 축구를 하다보니깐 여자축구가 비전도 없고, 또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수 시절에 동료들이 다쳤을 때 임시로 치료해준다거나 마사지를 해주다보니 운동처방사 쪽으로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선수 경력 14년의 ㄷ씨)
여자축구는 국제대회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월드컵에서 17살 이하(U17) 대표팀이 우승했고, 당시 20살 이하(U20) 대표팀이 3위를 차지했다. 2025년 7월16일엔 여자축구 대표팀이 2025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에서 20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았다.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여자축구는 활기를 잃어가고, 이는 팀 해체와 선수들의 은퇴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엔 은퇴 여성 선수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스포츠 분야 안에서도 (감독, 코치, 심판, 선수 트레이너 외에)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어요. 원래 스포츠 중계 해설위원도 예전엔 여성이 맡을 수 없었는데 요즘은 여성 해설위원도 많아졌고, 또 여성 전력분석관도 늘고 있어요. 전력분석관이 요즘 핫하다고 하더라고요. (스포츠 분야가 아니더라도)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할 수도, 교사를 할 수도 있어요.” 예린씨가 2025년 8월16일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예린씨가 은퇴선수들로부터 들은 가장 큰 고민은 부족한 일자리가 아니었다. 방향이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은퇴선수들) 이 말은, 양수안나 대표와 함께 2018년 ‘위밋업스포츠’(이하 위밋업)를 설립한 신혜미 대표도 위밋업을 찾아오는 여성 은퇴선수들로부터 많이 듣는 말이다. 여성 은퇴선수들이 여성과 아동에게 운동을 알려주는 사회적기업인 위밋업은 결혼과 임신, 출산 또는 팀 해체 등으로 인해 경력 단절 문제를 겪는 여성 은퇴선수들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
“은퇴선수들이 생각하는 진로 폭이 좁아요. 이를테면 심판, 경기감독관(운영위원), 재활치료사 등 자기가 선수로 뛰면서 본 것 안에서만 생각하거든요. 선수들이 ‘나는 다른 일은 못할 거야’ 이런 식으로 스스로 한계를 정해요. 그래서 면담을 통해 다양한 진로와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지도자(감독, 코치) 길만 권하지 않아요. 대학 또는 대학원 진학을 권하기도 하고, 국외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를 제안하기도 해요. 영어가 안 된다고 걱정하는 선수들에게 제가 말하죠. ‘나도 에이비시(ABC)만 알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갔다. 하지만 괜찮다. 어떤 식으로든 적응했다. 그리고 선수 경력자가 외국에 나가면 더 유리하다. 외국 사람들이 운동을 잘하는 사람에게 많은 호감을 느낀다. 네 실력을 보여주면 널 멋있게 볼 거야.’”
신혜미 대표가 8월12일 한겨레21에 한 말이다. 대학 때까지 축구선수로 뛰었던 신 대표는 은퇴 뒤 여성스포츠리더 과정을 거쳐 중국 상하이체육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을지대와 한국체육대에서 스포츠마케팅과 스포츠산업, 축구 관련 강의를 했다.
대한체육회는 그동안 진로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은퇴 예정인 현역선수나 은퇴한 선수들을 지원했다. 이 사업은 2025년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 이관됐다. 그러나 진로지원센터 이용률은 현저히 낮다. 2022년 선수등록을 하지 않은 967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79.01%(764명)가 진로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대한체육회 ‘2023년 선수경력자(은퇴선수) 진로실태조사 결과보고서’) 가장 많은 63.74%(487명)가 ‘어떻게 참여하는지 몰라서’라고 답했다. 두 번째로 많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15.97%·122명) 응답 비율과의 격차가 상당하다.
사후관리 부재와 단발성의 단순 교육도 문제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아니면 이제 막 은퇴한 분들을 위한 정보는 많은데, 잠깐 일했다가 다음 커리어를 준비하는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아로 경력이 멈췄거나, 스포츠지도사(를) 하다가 일반 기업으로 가고 싶어 하는 분도 많은데, 그분들은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사후관리 차원에서 직장 생활에 대한 매너나 커리어의 방향성, 포트폴리오를 같이 만들어보는 수업 같은 게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대한체육회 보고서를 쓴 연구진이 2023년 9월 진행한 포커스 그룹 인터뷰에서 한 은퇴선수가 남긴 말이다.
다음은 2021년 발행된 한국스포츠학회지 제19권 4호에 실린 논문 ‘은퇴선수들의 진로지원을 위한 미래정책’ 본문 중 일부다. “진로교육은 장기적인 안목과 꾸준한 지원이 필요하다. 단순히 일회성 교육을 통해 그들의 진로를 결정할 수는 없다. 특히 체육인의 특성상 오랜 기간 운동 이외에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단기 취업 성과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방식은 체육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중·고교 때부터 선수들이 은퇴 뒤 제2의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영감을 주는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고등학교 때 십자인대를 다쳐서 6개월 정도 재활훈련을 했어요. 그 기간에 축구심판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자격증 취득 전까지만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선수로 뛰는 것밖에 생각을 못했거든요. 학생 때부터 이런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가 열렸으면 좋겠어요.” 예린씨의 말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학업과 운동의 병행을 방해하는 스포츠계의 폐쇄적인 문화 개선이다. 이런 환경 안에서 선수들은 체육 외의 다른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다.
신혜미 대표도 예린씨와 마찬가지로 과거보다 여자축구 선수를 포함한 여성 은퇴선수가 갈 곳이 많아졌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주요 자리, 예를 들어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가 대표적이죠. 그 자리에 여성 감독이 못 가요. ‘2020 도쿄올림픽’ 때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을 전주원이 맡으면서 여자축구계도 흐름이 바뀌나 싶었는데, (2024년 10월)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결국 남성이 선임됐어요.” 전주원 감독 사례는, 올림픽 여자농구 대표팀은 물론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을 통틀어 최초로 한국인 여성 감독이 선임된 것이었다.
신 대표는 이어서 말했다. “대한체육회나 각 회원종목단체(협회·연맹)가 하는 사업 결정권을 가진 임원들을 보면 대부분 남성이에요. 능력이 비슷해도 여성보단 남성을 뽑죠. 제가 아는 여성 선배 중에 협회 임원을 맡고 계신 분이 있는데, 회의 때 말을 안 한대요. 조용히 있는 게 오래가는 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의견을 내는 대신 입을 다물고 그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게, 여성이 갈 수 있는 자리를 지킬 방법이죠. 여성이 발언권을 얻어 말하는 걸 싫어하는 분위기니까. 되게 서글픈 일이에요.”
젠더 편향이 극심한 남성 중심 스포츠계에서 여성 지도자가 받는 압박은 상당하다. 예린씨는 지인이 경험한 일을 전했다. “지인이 초등학교에서 축구 종목 엘리트 클럽 전문 강사로 일해요. 스포츠클럽이 저학년 반(1~4학년)과 고학년 반(5·6학년)으로 운영되는데, 지인은 저학년밖에 못 가르쳐요. 학교에서 ‘저학년 학생들이 축구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일’로 역할을 좁혀놨거든요.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또 고학년 남학생들이 여성 지도자를 낮추보는 경향이 있어요. ‘저 선생님은 나보다 못해, 배울 게 없어’ 이렇게 여기죠.”
“어떤 여성 감독 또는 코치가 선수들 지도를 잘하지 못하거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많은 사람이 ‘여자라서 안 돼’라고 생각해요.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은 그 감독이나 코치 개인의 능력과 전문성이 부족한 건데 성별 문제로 보죠. 반면 남성 지도자가 잘하지 못할 때 ‘남자라서 그래’라는 말은 안 하잖아요.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어요. 왜냐면 계속 비교를 당하니까.”(신혜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