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도 못 쓰는 천연잔디구장, 창녕에서 마주친 남루한 현실

류석우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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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8.22. 오후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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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축구 희망 찾기][경기장에 투사된 한일 여자축구 격차] 여자축구 최대 축제 ‘전국선수권대회’ 3박4일 참관… 인프라도, 선수 배려도, 상금도 없었다
2025년 8월1일 찾은 경남 창녕군 창녕스포츠파크 3구장 모습. 천연잔디가 파이다 못해 비었다. 그 사이로 새로 자란 풀이 보인다. 류석우 기자


잔디가 파이다 못해 비었다. 관람석에서 내려다보니 경기장 곳곳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흙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관람석에서 내려가 조금 더 가까이 갔다. 흙바닥을 드러낸 곳엔 잔디가 아닌 다른 풀이 자리를 잡았다. 잔디가 빠진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모내기 중인 논 같기도 했다.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축구경기장으로 보이진 않았다. 경남 창녕군 창녕스포츠파크에 있는 천연잔디구장의 모습이다. 경기장을 둘러보는 동안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축구를 할 수 있다고?

 

잔디 파인 자리에 자라난 풀… 개회 전날 장소 변경


2025년 7월31일부터 8월12일까지 창녕스포츠파크에서 제24회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여자축구 단일대회로는 가장 큰 규모로, 국내 여자축구 전문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회다. 이번 대회엔 초등학교 팀부터 여자축구 최상위 리그인 더블유케이(WK)리그 팀까지 모두 62팀이 참여했다. 한겨레21은 대회 개막날인 7월31일부터 8월3일까지 나흘 동안 창녕 부곡에 머물며 직접 경기를 보고 선수들과 지도자, 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한국 여자축구가 처한 남루한 현실이 있었다.

7월31일 저녁 8시30분, 창녕스포츠파크 메인 경기장인 4구장을 찾았다. 이날은 선수권대회 개막날이자 WK리그 8개팀의 첫 경기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4구장에선 저녁 8시50분부터 창녕WFC와 수원FC위민의 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었다. 일정상으로도 저녁 8시30분엔 서울시청과 세종스포츠토토여자축구단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어야 했다. 여자축구연맹 누리집에 들어가보니 일반부 경기장이 7경기장으로 변경됐다는 공지가 하루 전에 올라와 있었다. 서둘러 7구장으로 향했다.

경기 시작 직전에야 7구장에 도착했다. 7구장은 4구장과 달리 인조잔디구장이다. 몸을 푸는 선수들 너머로 관람석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스탠드가 보였다. 이곳에 양 팀 관중을 합쳐 50여 명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선수 가족들로 보였다. 창녕스포츠파크를 홈구장으로 쓰는 창녕WFC 쪽의 관중이 조금 더 많았다. 퇴근하고 경기를 보러 왔다는 한 창녕WFC 팬은 “창녕WFC가 홈팀인데 제일 구석진 경기장을 주는 게 맞느냐”며 “천연잔디구장도 있는데 여기서 경기하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하루 전인 7월30일, 수원FC위민 선수단이 참여한 단체 메신저 방에 사진이 하나 올라왔다. 사진 속 천연잔디구장은 잔디구장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사진을 올린 매니저는 잔디 상태로 인해 구장이 변경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저희가 여기 도착한 날부터 잔디를 보면서 ‘여기서 어떻게 뛰라는 거지’라는 말을 했어요. 훈련하는데 여러 분이 와서 잔디를 보고 가더니 선수단에 그런 공지가 올라오더라고요.” 8월1일 창녕에서 만난 수원FC위민의 선수 송재은이 말했다.

 

주최 쪽 “폭우 탓”… 선수들 “지난해에도 이 지경”

2025년 8월1일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축구 경기장을 드론으로 찍은 사진. 메인 경기장인 4구장(아래 왼쪽)과 3구장(아래 오른쪽)은 잔디 훼손이 심해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3구장은 아예 불이 꺼져 있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일곱 개의 축구경기장이 있는 창녕스포츠파크엔 천연잔디구장이 두 개 있다. 애초 7월31일 열리는 일반부 네 경기는 모두 두 천연잔디구장에서 나눠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인 7월30일 연맹은 경기장을 변경하기로 했다.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잔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다. 여자축구연맹 쪽은 한겨레21에 “얼마 전에 폭우가 와서 이 근처가 다 잠겼다”며 “현장에 도착해서 실사를 가보니 도저히 뛸 수 없는 상황이라 인조잔디구장으로 바꿨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수들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창녕에 올 때마다 늘 안 좋아요. 지난해 선수권대회 때도 정말 심했는데 그냥 (구장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천연잔디에서 진행했거든요. 잔디가 다 파였고 빈 곳도 많아서 공도 이상하게 튀었어요. 그때는 정말 경기가 제대로 진행이 안 될 정도였어요. 여기가 제일 심해요. 이런 잔디에서 할 바에는 차라리 인조잔디가 나은 것 같아요.” 송재은의 말이다.

창녕에서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린 건 2018년부터다. 이천 대교 여자축구단이 해체된 이후 창녕군의 지원을 받은 창녕WFC가 출범하면서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도 이곳에서 열리게 됐다.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경기장에서 초등학교부터 일반부까지 모든 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 대회가 유일하다. 어린 선수들은 일반부 선수들의 경기를 가까이서 보고, WK리그 소속 선수들도 모교나 지역 연고 팀을 찾아 함께 훈련하기도 한다.

2025년 8월1일 저녁 8시10분 6구장에서 열린 서울 동산고와 강원강릉FC U18 위민 경기에서도 WK리그 소속인 서울시청 아마조네스 선수단을 볼 수 있었다. 유영실 서울시청 감독은 대회 직전 서울 동산고, 서울 우이초, 서울 험멜 WFC U15 세 팀에 서울시청과 같은 유니폼을 선물하기도 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서울시청 선수 한채린이 크게 “동산, 파이팅”을 외쳤다. 전날 같은 구장에서 열린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WFC와 화천KSPO의 경기 때도 인천 지역의 가림초와 디자인고 축구부가 단체 관람을 오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 모든 여자축구 선수가 한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대회인데, 시설과 인프라는 ‘빵점’이다. 일본과 영국에서 1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22년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축구 ‘레전드’ 지소연은 2024년 11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탈의실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창녕스포츠파크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천막 탈의는 외국이라면 난리 날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선수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항상 그래왔으니 그러는 거라지만 이제는 바뀔 때입니다.” 지소연은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나마 올해는 천막 대신 컨테이너 탈의실

경남 창녕스포츠파크 축구 경기장에 설치된 선수 탈의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지소연의 일침 이후 열린 이번 대회에선 탈의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경기장마다 작은 컨테이너를 설치해 선수 대기실과 탈의실을 만들었다. 간이 천막만 설치했던 이전 대회와 견주면 큰 변화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은 많다. 직접 들어가본 탈의실은 너무 작았고 대기하는 장소로도 비좁았다. 일부 구장은 대기실과 탈의실이 떨어져 있어 그냥 천막 밑 대기 장소에서 옷을 갈아입는 선수도 보였다.

탈의실뿐만이 아니다. 대회 모든 경기는 유튜브로 중계됐는데 비가 많이 내린 날엔 일부 경기 중계가 끊기기도 했다. 8월2일, 저녁 7시40분쯤부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1구장에선 인천 가림초와 서울 남산초의 후반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3분쯤 지났을 때 중계 화면에 버퍼링이 생겼고, 5분 뒤부터는 경기 송출이 완전히 멈췄다. 같은 시간 4구장에서 진행된 화천KSPO와 상무여자축구단의 경기에선 구장 조명 중 하나가 꺼졌다. 전광판에 경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오지 않는 구장도 있었다.

 

2025년 8월2일 전남 광양중앙초등학교 여자축구단 지도자가 선수들에게 물을 분무해 열을 식혀주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문제는 시설에만 있지 않았다. 경기 일정 자체가 선수들에게 가혹했다. 일반부의 경우 결승까지 진출하는 두 팀은 9일 동안 다섯 경기를 치러야 했다. 두 경기의 간격이 하루에 불과했다. 빡빡한 일정으로 유명한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서도 이 정도로 밭게 경기가 진행되진 않는다. 국제축구연맹(FIFA) 등은 선수의 피로와 부상 방지 등을 위해 연속 경기 사이에 최소 2일(48시간) 정도 간격을 두도록 경기 일정을 편성한다.

게다가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는 가장 더운 시기에 진행된다. 이번 대회는 대부분 저녁 7시 이후 경기가 진행됐지만, 2024년까지만 해도 오후 5시 경기가 있었다. 개막날인 7월31일 오후 5시 창녕의 기온은 35도였다. 송재은은 “특히나 이 대회가 한창 더울 때 진행하는데 회복 시간도 너무 적고 부상도 당하기 쉽다”며 “이건 정말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선수 보호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의 여자축구 프로리그인 위(WE)리그에서 뛰다 2024년 수원FC위민으로 이적한 아야카 니시카와도 “일본에선 지금 하는 것처럼 스케줄이 빡빡한 대회는 없다”고 지적했다.

 

EPL보다 빡빡한 일정, 부상 무방비


이번 대회 일반부 우승은 화천KSPO가 차지했다. 그러나 우승 상금은 없다. 우승 상금뿐 아니라 준우승 등 입상팀에 대한 상금 자체가 없다. 일부 예산이 넉넉한 구단은 선수들에게 승리 수당을 지급하지만, 창녕WFC 등과 같이 예산이 늘 부족한 팀에는 그마저도 없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열악함이 창녕스포츠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창녕WFC에는 일상이다. 창녕WFC는 다른 WK리그에 참여하는 팀과 달리 여자축구연맹이 직접 운영한다. 이천 대교의 해체로 WK리그 참가팀이 7개로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연맹이 문화체육관광부와 창녕군 등의 지원을 받아 팀을 떠안았다. 구단주도 여자축구연맹 회장이다. 2024년엔 예산 문제로 팀이 아예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25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위기다.

8월2일 창녕스포츠파크 4구장에서 화천KSPO와 상무여자축구단이 경기하던 중 폭우가 내리고 있다. 창녕(경남)=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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