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와 밀착해 월드컵마저 정치적 도구화…국제 축구계 혼돈
2026년 북중미 월드컵 개막이 9개월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이은 발언과 행보가 국제 축구계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안전하지 않은 도시에서는 월드컵을 치를 수 없다”며 개최 도시 변경 가능성을 언급했다. 앞서는 이스라엘의 월드컵 참가 문제까지 끌어들였다. 미국, 영국 등 세계 주요 언론은 그의 발언을 두고 “정치 쇼”라고 비판하면서도, 국제축구연맹(FIFA)과의 밀착 관계 속에서 실제 압박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며 우려도 표시하고 있다.
■“위험 도시론”으로 불붙은 개최권 논란
트럼프는 지난 9월 말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범죄가 만연한 도시에서는 세계인의 축제를 치를 수 없다”며 월드컵 개최권 재검토 가능성을 언급했다. 직접적으로 도시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언론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민주당 성향이 강한 대도시들이 주요 표적이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범죄율 수치를 살펴보면, 시애틀의 2024년 폭력 범죄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521건으로 2022년(557건)보다 감소했고, 샌프란시스코 역시 같은 기간 강력 범죄 건수가 8% 줄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치안 불안이 극심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언론 NBC는 “지역 정치인들이 즉각 반발하며 트럼프의 발언을 정치적 공격으로 규정했다”고 전했다. 시애틀 시장은 성명을 통해 “무지와 왜곡의 산물”이라 직격했다.
미국 대통령은 월드컵 개최지를 바꿀 법적·실질적 권한이 없다. LA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FIFA가 경기 배정을 전적으로 주관하기 때문에 트럼프의 발언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로이터통신도 “트럼프가 백악관 내 월드컵 준비 태스크포스를 출범시키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나, 경기 장소 결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FIFA는 2018년 이미 북중미 공동 개최를 확정했고, 2022년에는 16개 도시(미국 11곳, 캐나다 2곳, 멕시코 3곳)를 발표했다. 개최 도시는 각종 인프라 투자와 경기장 보수에 엄청난 돈과 행정력을 쏟아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일방적 발언은 준비 중인 도시와 시민들에게 큰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정치적 계산, 선거용 수사
전문가들은 트럼프 발언의 본질을 정치적 계산으로 본다. 민주당 지자체를 ‘위험 지역’으로 규정해 치안 불안을 부각하고 보수층 결집을 노린다는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비영리·비당파 성향의 여론 조사 및 사회 연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 조사(2025년 8월)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 62%는 “범죄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인식했으나, 미국 연방수사국(FBI) 통계는 2024년 전국 폭력 범죄 발생률이 전년 대비 5.6%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현실과 사람들의 인식 간 괴리를 트럼프가 적극 정치에 활용하는 셈이다. 영국 가디언은 “트럼프가 월드컵까지 정치 무대로 끌어들이며 대선 전략에 활용하려 한다”고 꼬집었고, 영국 뉴스 전문 채널 스카이뉴스는 “실행 가능성보다는 정치적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 미국 대통령선거는 2028년 11월 치러진다. 트럼프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재선에 도전하리라 예상된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월드컵 참가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 반트럼프 성향이 뚜렷한 매체 데일리 비스트는 “트럼프가 국제 축구 무대를 외교 전장으로 활용하려 한다”며 “친이스라엘 보수 유권자를 겨냥한 행보”라고 비판했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최근 가자지구 전쟁을 이유로 이스라엘의 자격 정지 여부를 표결에 부칠 가능성이 커졌으며, 집행위원 20명 중 과반이 찬성하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스라엘의 월드컵 출전 여부는 UEFA 결정이 먼저 나올 가능성이 높다. UEFA가 유럽 지역 경기와 회원국 자격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FIFA 동의 없이는 월드컵 본선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어렵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미국이 이스라엘 배제에 반대 입장을 공식화한 만큼 워싱턴의 외교적 영향력이 UEFA와 FIFA 판단 과정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FIFA 밀착, 정치적 도구화
트럼프가 국제 축구를 정치 도구로 삼을 수 있는 배경에는 FIFA와의 밀착이 자리한다. 그는 지난해 7월 클럽월드컵 결승에 참석했고, FIFA는 뉴욕 트럼프타워에 사무소를 열었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트럼프와의 관계는 월드컵 성공에 필수적”이라고까지 언급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국제 스포츠 기구가 특정 정치 지도자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비판했고, 가디언도 “스포츠 외교 명분은 개방과 환대지만, 트럼프의 미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 7월 미국에서 열린 FIFA 클럽월드컵은 내년 월드컵을 앞둔 리허설이자 경고음이 됐다. 폭염 속 한낮 경기 강행으로 선수와 팬 모두 큰 불편을 겪었으며, 신시내티에선 관중이 제한된 음수대와 7달러(약 9500원)에 달하는 고가 생수 때문에 불만을 터뜨렸다. 글로벌 스포츠전문 매체 디애슬레틱 보도에 따르면, FIFA는 대회 기간 145건의 인권 관련 제보를 접수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 정부기관의 단속에 대한 불만이었다.
차별 사례도 이어졌다. 도르트문트 경기에서는 동성애 혐오 응원가가 울려 퍼졌고, 레알 마드리드 수비수 안토니오 뤼디거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권 단체들은 FIFA가 차별 철폐 메시지를 축소했다며 반발했다.
국제 스포츠는 국경을 넘어 교류와 화합을 이루는 장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행보는 이 원칙과는 정반대다. 텔레그래프는 “트럼프의 발언이 현실화하면 FIFA와 주최국 간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며 “국제 스포츠 행사의 정치적 중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비자 정책으로 브라질 탁구 챔피언, 세네갈 여자 농구 대표팀 등이 지난여름 입국을 거부당한 사례는 국제 스포츠계 불신을 키우고 있다.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특별한 대회”라는 트럼프의 공언은 현실과 괴리를 보인다.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갇히는 순간, 축구는 더 이상 ‘세계인의 언어’가 아닌 ‘특정인의 정치 쇼’로 전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