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무슨 죄?…‘일제 잔재 청산’ 내세워 50년 플라타너스 베어낸 마포구

백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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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23. 오전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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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반복되는 소나무로 대대적 교체 진행
주민들 송진 피해 걱정 ‘졸속 행정’ 비판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 일대에 가로수 교체 사업이 진행 되기 전인 지난해 8월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등이 가로수로 있었으나(왼쪽 사진), 사업 이후인 지난 6월 이 자리에 소나무가 새로 심겨 있다(오른쪽 사진). 카카오맵 로드뷰 사진 갈무리


서울 마포구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마포구 일대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와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소나무로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소나무 고사가 반복되고, 일부 주민들은 송진 피해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22일 찾은 마포구 삼개로에는 새로 심은 소나무 가로수가 지지대에 묶여 줄지어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나무들로 보였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갈색으로 변한 잎들이 눈에 띄었다. 인근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박수인씨(49)는 “멀쩡한 나무를 베어내더니 새로 심은 소나무가 한 달도 못 버티고 죽었다”며 “(소나무가) 죽은 자리에 큰 화분을 놓았다가 최근 새 소나무를 또 심었다”고 말했다. 주민 김모씨(39)는 “소나무를 심는다는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꽃가루가 걱정됐다”며 “아이가 9살인데 봄마다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한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삼개로 일대의 양버즘나무 가로수가 있던 모습(왼쪽 사진). 소나무로 교체된 모습.(오른쪽 사진) 삼개로의 소나무 15그루는 한 달 정도 뒤 고사했다. 구민 제공


마포구는 지난 6월 마포대교 북단에서 공덕역까지 약 1㎞ 구간에 ‘품격 있는 녹색 특화거리 조성사업’을 시행했다. 기존 양버즘나무 82그루와 은행나무 41그루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소나무 243그루(마포대로 189주·삼개로 54주)를 심었다. 총사업비는 17억여원에 달한다. 구 관계자는 “플라타너스는 일제강점기 도시미관 정비정책의 산물로, 이번 사업은 한국적 자연미를 살리고 낙엽·악취 등 생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플라타너스가 간판을 가리고 배수구를 막는 등 주민 민원이 많았고, 일부 노령목은 내부 부패로 안전사고 우려가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환경단체는 사업 명분부터 타당치 않다고 지적한다. 서울환경연합이 지난달 30일 나무의사와 함께 공덕역~아현역 구간의 플라타너스 192그루를 조사한 결과, 166그루(86.5%)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고, 벌목이 필요한 수준의 나무는 6그루(3.1%) 뿐이었다. 주민 이보배씨(41)는 “낙엽이나 간판가림 문제는 가지치기 등 관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며 “건강한 나무를 무리하게 교체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서초구 반포대로의 플라타너스는 ‘사각 가지치기’ 등 특화 관리를 받아 도시 경관 자원으로 재탄생한 사례로 꼽힌다.

양버즘나무 사각 가지치기 작업을 한 방배로. 서초구 제공


새로 심은 소나무의 생육 상태도 좋지 않다. 지난 6월 한 건설업체가 기증한 소나무 54그루를 삼개로에 심었는데 이 중 15그루는 한 달 만에 고사했다. 그 자리엔 또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 마포구는 “기증받은 것이라 다른 수종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해명했지만, 주민 양희우씨(42)는 “도심 환경에 맞지 않는 나무를 가로수로 고집한 게 문제”라며 “죽은 나무를 다시 같은 수종으로 심는 건 낭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나무가 도로변 가로수로 부적합하다고 지적한다. 이상돈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소나무는 병충해와 화재, 공해에 약하고 여름철 열섬현상과 겨울철 염해로 잎이 쉽게 갈변한다”고 말했다. 또 “좁은 수관 탓에 그늘 효과가 작고, 폭설 시 가지가 부러져 교통사고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도 했다. 마포구는 “소나무는 한강과 이어지는 바람길에 적합한 미세먼지 저감 우수 수종(산림청 지정)”이라고 주장하지만, 경기개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양버즘나무의 탄소저장량(361.6kgC/tree)은 소나무(47.5kgC/tree)의 7배를 웃돈다.

사업 시행 이전 기존의 마포대로 다층의 도시숲 모습. 구민 제공


절차적 정당성 논란도 불거졌다. ‘지방자치법’과 ‘행정절차법’은 주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의 경우 사전 의견 수렴을 의무화하고 있다. 마포구는 사업 시행 전 주민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으나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후 반발이 커지자 사업 도중인 지난 7월 주민 1200여명을 대상으로 재조사를 해 “동의율이 61%”라고 발표했다. 장정희 마포구의원에 따르면, 지난달 16일 열린 주민설명회는 통장 등 일부 인원에게만 통보됐고 “사진 촬영이 금지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마포구는 “마포대로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외국 국가 원수와 귀빈이 지나던 길목으로, ‘귀빈로(貴賓路)’로 불려왔다”며 “소나무를 심어 그 역사적 의미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귀빈로’는 군사정권 시절 국가 이미지를 내세워 조성된 것이라,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건물주들에게 외벽 도색과 간판 정비를 강요했다는 증언이 지역 구술사와 회고록에서 확인된다.

논란이 이어지자 마포구는 지난 20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사업은 일제강점기 도시정비 정책의 흔적을 지우고,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라고 재차 강조했다. 구는 당초 7억원을 추가 편성해 2차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현재 보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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