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무역협상이 급물살을 탄 가운데 한국 정부 경제·통상 고위 관계자들이 16일(현지시간) 동시에 미국을 찾아 막판 총력전에 돌입했다. 한국 협상단은 대미 투자금 3500억달러(약 500조원) 선불 지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미국 측 실무 장관들에게 이해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나, 여전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다.
이들은 이날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을 만나 대미 투자 방식 등에 대한 세부 조율에 나서는 한편, 백악관을 방문해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워싱턴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특파원단과 만나 “대미 투자금을 선불로 지급할 경우 한국 외환시장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처럼 한꺼번에 출자하는 것은 힘들다는 점을 이제는 베선트·러트닉 장관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느냐 하는 부분은 불확실성이 있다”면서 “두 장관에게 행정부 내부에 (한국 입장을) 전해달라고 요청했고, 충분히 설명하겠다는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에도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관세 성과를 열거하면서 “한국은 3500억달러, 일본은 6500억달러를 선불로 지급하기로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구 부총리는 “통화스와프가 체결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아니다”라며 “지금 협상은 러트닉 장관과 하는 것이 본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러트닉 장관이 대미투자 방식에 합의하면 그에 따라 소요되는 외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통화스와프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얼마나 해야 할지 등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미투자금 3500억달러에서 현금 투자와 대출·보증 비중, 투자 기간 등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한국 외환시장에 미칠 영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투자 방식이 가닥이 잡힌 뒤에 외환시장 안정 방안도 논의돼야 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장관도 이날 오후 워싱턴 상무부 청사를 찾아 러트닉 장관과 회동했다. 이 자리에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도 함께했다. 김 장관이 지난 4일 뉴욕을 찾아 러트닉 장관을 만난 지 2주도 안 돼 다시 마주한 것이다.
앞서 김 장관은 김 실장, 여 본부장과 함께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을 찾아 러셀 보트 국장과 약 50여분 동안 양국 간 조선업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김 실장은 “OMB가 조선업 프로젝트에 굉장히 중요한 부처”라며 “그래서 OMB의 얘기를 좀 듣고, 한국과 미국의 조선산업 협력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서로 인식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국이 마스가의 대표적 업체인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겨냥해 제재를 발표한 것도 논의했는지 묻자 김 장관은 “그런 이야기까지는 아니고, 구체적으로 (마스가와 관련해) 어떤 프로젝트를 할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대미투자금 3500억달러 중 1500억달러를 별도로 조선 분야에 특화하는 방안을 미국 측과 계속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투자금 집행 방식 등에 대한 이견 때문에 두 달 넘게 지지부진하던 한·미 무역협상 논의가 최근 갑자기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로 미·중 간 무역전쟁 재개 조짐이 나타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미국으로선 동맹과의 무역협상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하고, 중국에 집중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최종 타결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 실장은 앞서 이날 입국 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나 “지금까지와 비교할 때 양국이 가장 진지하고 건설적 분위기에서 협상하고 있다”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이 잘 마무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