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소식이 주말 내내 톱 뉴스에 올랐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공장을 세우러 간 한국인 300여명이 미국 이민 당국에 구금당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해외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인이 한꺼번에 구금되는 건 초유의 일입니다. 미국은 이들이 ‘불법체류자’라고 주장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도 있습니다. 오늘 점선면은 미국의 한국인 구금 사태와 관련해 현재 상황과 맥락을 정리했습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이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서배나의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내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했습니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엔솔)이 합작해 세우는 공장으로, 한미 경제협력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미국 당국은 475명의 '불법체류자'를 구금했다고 밝혔는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300여명에 달했습니다. 출장을 나와 있던 LG엔솔 직원 47명과 협력사 직원 250여명 등입니다. 현대자동차 소속 직원은 구금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체포는 강압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현장에 들이닥친 500여명의 단속 요원들은 한국인 직원들의 팔다리를 쇠사슬과 케이블 타이로 결박했습니다. CNN은 단속 현장이 전쟁터나 다름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구금된 한국인들은 조지아주 포크스턴 구금시설에 수용됐는데요. 이곳은 변기가 막히고 곤충이 들끓는 등 열악한 위생으로 여러 차례 감사에서 지적받아 왔습니다. 정부는 외교부와 주미 대사관, 주애틀란타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총력 대응에 나섰습니다.
단속을 당한 배터리 공장은 미국에서도 매우 기대가 큰 사업이었습니다. 조지아주 정부는 이 공장을 두고 “지역 최대 경제 개발 프로젝트”라고 칭찬했습니다. 공장이 완공되면 8500명 이상의 고용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미 투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던 미국이 왜 갑자기 공장을 덮쳤을까요? 미국 정부는 한국인들의 비자 유형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단기상용비자(B1)나 전자여행허가(ESTA)로 입국한 이들이었습니다. B1은 비즈니스 회의나 계약, 직원 교육, 세미나 등으로 최대 6개월 체류하는 비자입니다. ESTA는 단기 체류 무비자로 주로 출장에 활용됩니다. 미국은 정부는 이들이 전문직 취업비자(H-1B)나 주재원비자(L1·E2)를 받지 않고, 취업이 금지된 단기 비자로 현지에서 일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점들도 있습니다. 우선 이들 중 몇 명이 진짜 불법적인 취업 활동을 했고, 몇 명이 B1이나 ESTA의 목적에 맞게 교육 등 활동을 했는지를 미국 당국이 정확히 파악했는지 의문입니다. 동생이 이번 단속으로 구금된 A씨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동생은 B1 비자로 2개월 정도 머무르며 현지 노동자를 교육하러 갔다”며 “미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을 지원하러 온 사람들까지 구금해도 되는 것이냐”라고 했습니다. 미국 당국은 구금자들을 상대로 소속 회사와 업무 등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미국 당국이 일부러 대규모·과잉 단속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국 국토안보부는 “제보를 받아 단속을 준비했다”고 했는데요. 이번 단속 수색영장에 적힌 체포 목표 인물은 중남미 이민자 4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500여명의 단속 요원을 투입했죠. 처음부터 한국인 대규모 구금이 목표였을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굳이 이런 대규모 구금 작전을 벌였을까요?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자국민 우선주의’와 ‘제조업 리쇼어링(생산시설을 다시 자국으로 되돌리는 것)’ 등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관세전쟁으로 해외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투자도 약속받았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번 단속으로 해외 기업들에 ‘미국인을 더 많이 고용하라’는 압박을 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우방국도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은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데다 얼마 전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는데도 이번 단속이 일어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조치가 부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미국에서 자동차나 물건들을 팔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일방적인 거래가 아니다”라고 답했어요. 해외 기업의 대미 투자가 미국에만 유리한 것은 아니니 미국이 단속에 나서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매사추세츠주 등으로 대규모 이민자 단속 작전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주로 히스패닉과 무슬림을 표적으로 하던 미국의 이민 단속·추방 정책이 아시아계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게 이번 일로 드러났습니다. 한국처럼 미국의 오랜 동맹국이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일본에서도 “단속이 아시아계로도 확대되고, 외국계 기업 공장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인에게 취업 비자를 잘 내 주지 않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들어 전문직 비자 거부율이 급증했고,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B1과 ESTA 등으로라도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국내 기업 관계자는 “(숙련이 부족한) 미국인들을 고용해서 언제 공사기일을 맞출 수 있겠느냐”며 “비자 문제 등에 대해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탄탄한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자유무역과 경제협력을 추구하던 미국은 이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사태도 ‘자국 내 투자 확대’와 ‘불법 이민 단속 강화’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모순된 두 정책이 충돌한 결과입니다. 외신들도 “동맹국들과의 관계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미 외교와 경제협력에 갑작스럽게 암초가 돌출된 상황. 다행히 미국 측과 석방 교섭이 마무리됐다고 하는데요. 구금된 이들이 안전하게 돌아오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가 잘 대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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