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재난 ‘적응’하지 못한 사회, 재난 이후에도 ‘회복’은 요원[기후적응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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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5.17. 오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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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 주민 김옥기(88)할머니가 29일 자신의 집에서 아직 복구하지 못한 방에 앉아 있다. 문재원 기자


기후 재난을 대비하는 것만큼이나 재난 이후 사회의 ‘회복’도 중요하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기후변화 적응의 3가지 축 중 하나로 ‘회복력의 강화’를 꼽는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도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기후변화 적응의 주요 요소로 꼽았다. 올해 11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개막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실무진 협상에서도 적응 목표 설정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기후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탄력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지난해 3월 초대형 산불로 피해를 본 울진, 같은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수많은 이재민을 만든 포항의 오늘은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다.

지난해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범람한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리 인근 칠성천 너머로 29일 주택가가 보이고 있다. 문재원 기자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리 옆으로 지난해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범람한 칠성천이 29일 내린 비로 불어 있다. 천 제방보다 마을이 수m 낮다. 강한들 기자




지난달 29일,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리에는 전날부터 최대 94.5㎜에 달하는 비가 내렸다. 빗소리가 창문을 ‘타닥타닥’ 때릴 때마다 주민들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로 제내리 일대는 집 안 2m까지 물이 찼다. 주민들은 다락방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제내리 옆 칠성천은 이틀간 내린 비에 금세 불었다. 제내리는 하천 제방보다 수m 낮은 곳에 자리잡아 ‘상습침수지역’이다. 물이 제방을 넘으면 마을은 꼼짝없이 잠긴다. 이미 4차례나 수해를 겪었다.

제내리에서 40여년을 이웃하며 살아온 동갑내기 정화자씨(80)와 한차섭씨(80)는 이날 그치지 않는 비를 보며 밤을 새웠다. 한씨가 말했다. “물난리 나고, 본정신 돌아온 지가 이제 몇 개월 안돼. 비가 오면 걱정이 돼서 누(워) 있다가도 바깥에 나가보고, 자다가 일어나서도 나가본다”.

정씨가 지난해 물난리를 겪은 집안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은 다 새 것이었다. 물에 잠긴 뒤 다 새로 샀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곰팡내가 더 많이 났다. 장판을 들추니 새까만 곰팡이 띠가 나타났다. 정씨는 한달 기름값만 70만원씩을 쓰며 보일러를 두달 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합쳐서 80년 남짓을 대송면 제내리 일대에서 살아온 동갑내기 정화자씨(80)와 한차섭씨(80)가 지난달 29일 곰팡이 핀 정씨의 집에 앉아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됐던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에서 29일 김해식 대송면 비상대책위원장(72)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집을 살펴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1리 주민 김순자(77)씨가 29일 자신의 집에서 복구를 마친 방 벽지에 올라온 곰팡이를 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유원호씨(67)는 지난 5월28일 밤, 집을 비우고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갔다. 각종 전자제품의 전기 코드는 다 뽑아뒀다. 유씨는 “집사람이 하도 불안해해서, 아파트 고층 동서 집으로 갔다 왔습니다. 그까지는 물이 안 찰 거 아입니까”라고 말했다.

수해의 기억은 불편함도 잊게 만든다. 제내리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김모씨 방은 벽 한쪽이 휑하다. 수해 전에는 붙박이장으로 가려져 있던 벽이다. “방에 아무것도 없니더. 다 떠내려가고 (장)농도 안샀니더. 또 떠내려가면 우야노” 이제 김씨는 소금을 살 때도 장마 때 떠내려 갈까 걱정한다.

제내리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는 김모씨 방 벽 한쪽이 수해를 입은 지 9개월쯤 지난 지난달 29일 휑한 채로 남아있다. 강한들 기자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됐던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에서 29일 김태숙 대송면 비상대책위 사무국장(왼쪽)과 김해식 위원장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집을 살펴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됐던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4리에서 29일 김태숙 대송면 비상대책위 사무국장이 아직 복구하지 못한 집을 살펴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제내리 주민들이 수해를 겪는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 아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도 동네가 침수됐다. 저수지 둑이 터졌고 집집마다 거실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지난해 힌남노는 매미를 뛰어넘었다. 방 안까지, 삶을 위협할 정도로 물이 찬 것은 처음이었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과거 빈도’를 기준으로 대책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이동근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재난 대책은 ‘과거’의 기상 조건을 바탕으로 만든다”며 “(전 지구 평균기온이) 1.1도 오른 것이 지금인데 1.5도 이상 올랐을 때의 ‘극값’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 대책과 아예 다른 ‘적응’ 차원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민들은 지난해 11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책위는 “제내리가 상습피해지역임에도 행정당국과 시·도·국회의원들은 그때만 적당히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대책위 서명운동에 주민 2000여명 중 924명이 참여했고, 이를 지난 1월 포항시에 전달했다. 대책위는 제방을 높이라거나 빗물펌프장 기능을 강화하라는 단순한 요구만을 하지 않았다. 포항시에 아예 ‘이주 대책’을 요구했다. 김해식 대송면 이주 비상대책위원장은 “더 큰 태풍이 오고 침수되면 주민들은 알거지가 될 수밖에 없고, 인명 피해도 염려된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우선 ‘토건 대책’만 세웠다. 형산강 하도 정비, 항사댐 건설, 차수벽 설치, 빗물펌프장 기능 개선 등이다. 이 대책만으로는 주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주 대책이 포함된 ‘안전도시 조성 제도 개선 및 도시진단 용역’은 이달 입찰 공고를 냈고, 2024년 8월 완료된다. 포항시 관계자는 “힌남노 같은 태풍이 와도 하천에서 물이 범람하지 않는다면 이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심도터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난다면 1조가 넘는 예산이 필요할 수 있는 만큼 중앙정부에 예산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침수됐던 경북 포항시 대송면 제내리에서 29일 김해식 대송면 비상대책위원장과 김태숙 사무국장이 저수지를 살펴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회복탄력성에도 ‘취약 계층’이 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회복탄력성이 크다. 그래서 재난 이후 취약계층을 우선 지원하는 것이 ‘기후적응’의 대원칙이다.

지난달 26일 찾아간 경북 울진군 북면, 죽변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곳곳에 자리잡은 ‘콘테이너집’ 무리였다. 가로 3m, 세로 9m. 8평 남짓한 공간에 지난해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한 가구씩 산다.

지난달 26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 일대에 산불 이재민이 살고 있는 콘테이너 집 6곳이 모여 있다. 콘테이너 뒤편으로 산불 피해지의 모습이 보인다. 강한들 기자


경북 울진 산불 이재민 중 세입자인 박순례씨(69)의 8평 콘테이너집 내부의 모습. 강한들 기자


경북 울진 산불 이재민 중 세입자인 강현철씨(59)의 8평 콘테이너집 내부의 모습. 박씨의 집보다 단열재가 내부로 붙어 있어 더 좁아 보인다. 강한들 기자


지금 똑같은 콘테이너집에 살 듯 산불 이전엔 다 똑같은 가구였다. 그러나 산불 이후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갈라졌다. 산불이 이들을 갈라놓을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도시와 시골의 세입자는 다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폐가’가 되니, ‘집 관리’ 차원에서 저렴한 가격에 세를 놓는 집 주인이 많다.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는 사례도 흔하다.

강현철씨(59)도 비슷했다. 내 돈으로 집을 직접 고쳐가며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산불은 ‘흔적도 없이’ 집을 태웠다. 강씨는 산불이 나고 나서야 ‘내가 세입자였구나’를 체감했다. 집 주인은 정부지원금·국민성금을 받아놓고도 강씨가 살던 집을 다시 짓지 않기로 했다. 강씨는 집과 붙어있던 밭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강씨는 “다른 지역에서는 돈을 줘서라도 주민을 들이려 하는데, 울진은 세입자 이재민들에게 지역을 떠나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울진 산불피해 세입자 이재민 대책위원회가 지난 5월25일 경북 울진군 북면의 한 업체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강한들 기자


경북 울진 산불 세입자 이재민들이 8평 남짓한 박순례씨의 콘테이너 집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박순례씨(69), 전순덕씨(56), 강현철씨(59). 집에는 박순례씨와 박순례씨의 배우자가 살고, 전씨와 강씨는 다른 콘테이너 집에 산다.


산불 지원금은 세입자와 자가 소유자(집주인)에게 차등 지급됐다. 세입자 이재민은 정부지원금, 국민성금을 합쳐서 최대 5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집주인 이재민은 ‘최소’ 9000만원을 받았다. 집이 모두 탔으면 ‘비상시 거주’한 경우에는 9000만원, 집에 집 주인 또는 세입자가 상시 거주한 경우에는 집 면적에 따라 9000만~1억8000만원이다. 세입자가 살던 집의 주택 소유자는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다. 세입자들은 ‘폐가’ 수준 지원도 받지 못해 부당하다고 여긴다. 특히 국민성금 지원액에서 금액차가 컸다. 세입자 이재민은 4225만원을 받은 반면, 25평 이상 집을 가진 주택 소유자들은 최대 1억4200만원을 받았다.

산불 이재민 사이에서 ‘세입자’는 낙인이 됐다. 최형호 울진 산불피해 세입자 이재민 대책위 부위원장은 “세입자라는 단어 하나 붙여서 인간 취급도 못 받는 것 때문에 산불 났던 것보다 마음 속에 더 큰 불이 났다”고 말했다.

세입자 이재민들은 내년이 더 막막하다. 이재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콘테이너집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1년 정도 남았다. 울진군 소유가 아니라 울진군이 임대한 사유지에 놓인 콘테너이집들이 특히 위태롭다. 세입자들은 땅 주인이 땅을 비워달라고 요구할까 두렵다. 살던 곳에 다시 집을 짓고 살고 싶지만 집·땅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자체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는 회복하긴커녕 균열만 생겼다. 지난 5월25일 회의에서 울진군은 직접 들어온 성금을 세입자, 자가 소유자, 소상공인 등 다양한 주체가 자발적으로 나누라고 했다. 주시현 울진 산불피해 세입자 이재민 대책위 위원장은 “사실상 갈등을 방치한 셈”이라고 말했다.

정휘철 한국환경연구원 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기후변화는 식량, 에너지 등 모든 사회 문제로 전파되며, 취약계층은 특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적응의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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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environment/climate/article/20230625152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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