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서가] 소 키우며 시를 짓다, 고향의 시학

박영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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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20. 오후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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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보리 춤추다
구제근 지음 / 한누리미디어 펴냄

퇴직 후의 삶은 흔히 ‘쉼’이나 ‘여유’로 상징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된다. 30여 년간 공기업에 몸담았던 구제근 시인은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 소를 키우며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그 일상의 틈에서 시를 쓴다. 책은 그의 첫 시집이다.

구제근 시인은 충북 옥천 토박이다. ‘한국 현대시의 첫 미학자’로 불리는 정지용의 고향도 옥천이다. 시인은 정지용이 그러했듯 자연과 사람, 고향의 향취 속에서 시적 감성을 길러왔다. 오랜 직장 생활 동안 다듬지 못했던 감정과 언어는 이제 흙냄새 가득한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흐르게 됐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의 근원적 모티브로서의 인간애를 되새긴다. 시집에 실린 70여 편의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따스한 시선, 자연 속에서 발견한 순수한 감정이 잔잔히 깃들어 있다.

시집은 단지 한 개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한 세대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견뎌냈고, 퇴직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정신과 사유를 성찰하는 세대의 이야기다. 시인은 소를 키우고, 장례식장에서 봉사하면서 삶과 죽음이 맞닿는 자리에서 시를 쓴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진실하고 따뜻하다. 시 ‘새순’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순을 보며 인간의 성장과 역경을 떠올리고, ‘무지개’에서는 산자락을 감싸는 원목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연의 순환을 읽는다.

시집에는 옥천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해미 시인이 쓴 해설도 함께 실렸다. 그는 구제근 시인의 시세계를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순정한 서정”으로 평한다.

시인은 “작은 시집을 세상에 내놓으니 기쁨보다 두려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시를 향한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를 쓰는 기쁨, 가족의 응원, 삶의 깨달음, 그 모든 것이 ‘아이보리’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엮여 있다. 꾸민 말보다 진심 어린 문장이, 기술보다 삶의 체온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그의 시집은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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