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식 문제로 주변국과 마찰 가능성 있어 다소 불안”
“한·일(일·한)에 필요한 최소의 상황은 지금 현상을 변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 중 한 명인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명예교수는 21일 다카이치 사나에 새 정부 출범 뒤 한·일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날 한겨레와 전화통화에서 “다카이치 새 총리가 외교 분야에서 역사 인식 문제로 한국·중국 등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데서 다소 불안함이 있다”며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상대국 요구에) 적극적 대응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현재 유지되고 있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이전부터 고 아베 신조 전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태도로 주변국들의 우려를 샀다. 그는 각료 시절 태평양전쟁 에이(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빠짐없이 참배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을 추모했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1994년엔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 사죄·반성 뜻을 지닌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1924∼2025)를 상대로 “국민적 합의 없이 멋대로 일본을 대표해 사과하는 건 곤란하다”고 따진 일이 최근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기미야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의 지지 기반인 우파 쪽에서 역사 문제에 강경 발언을 요구할 수 있지만, 총리로서 외교 문제를 고려하면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이라며 “핵심 지지자들의 요구와 일본 외교를 위한 합리성 사이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기미야 교수는 ‘주요 정치인 다카이치’와 ‘총리 다카이치’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도 야당 시절과 대일 강경 발언을 했지만, 취임 뒤 우호적 관계에 적극 나섰다”며 “다카이치 총리 역시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에 걸맞은 합리적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다카이치 총리가 집권 초기부터 한국 정부와 이런 문제에 일정한 합의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도 당부했다.
‘사상 첫 여성 일본 총리’라는 화려한 꼬리표가 달렸지만 다카이치 총재 앞에는 각종 장애물이 쌓여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집권 자민당을 코너로 몰고 있는 고물가에 대한 대책이다. 기미야 교수는 “현재 일본 사회의 최대 문제는 물가 상승 대비 소득이 오르지 않는 경제 문제”라며 “다카이치 총리가 ‘적극 재정을 통해 경제를 선순환시키겠다'고 말해온 데 대한 국민 기대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도 하루 전 취임 기자회견에서 “정부 최우선 과제는 국민이 직면한 물가 상승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미야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가 일본유신회와 연립 조건으로 소비세 감세 등을 협상했는데 향후 방위비를 크게 늘리고 사회보장비는 줄이겠다고 말하고 있다”며 “야당도 이런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있지만 (정해진 재원으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과제가 많다. 전임 이시바 시게루 정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관세 협상을 마쳤지만, 5500억달러(783조원) 규모 ‘투자 청구서’는 다카이치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북핵·미사일 개발과 북·중·러의 군사적 밀착, 미·중 대립 등 주변국 그대로 남아 있다. 기미야 교수는 일본을 둘러싼 외교·안보 문제가 엄중한 상황인 만큼, 한국과 긴밀한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국제 정세에 비춰 비슷한 입장에 처한 한·일이 협력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6년 연립 동맹’을 맺었던 공명당의 이탈 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유신회와 파트너를 맺었지만 소수여당으로서 불안감은 여전하다. 기미야 교수는 “일본유신회는 애초 지역 정당이었고, 냉정하게 말하면 낡아버린 정당이란 느낌이 있어 자민당 내부에서도 회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며 “자민당이 과거 공명당과 관계처럼 장기간 안정적으로 일본유신회와 연립해 정권을 운영할 거라고 말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고 예상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중·참의원 양원 모두 소수여당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중의원 해산 뒤 총선거’를 치를 수 있지만, 승부수가 최악의 카드가 될 경우 정권 자체를 뺏길 수도 있다. 기미야 교수는 “당분간 일본 정치가 예전처럼 안정적인 상황은 꽤 어려워 보인다”며 “야당도 뾰족한 수가 없어 여러 당이 연립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도토리 키재기’ 같은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홍석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