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종식’의 본질은 부패한 엘리트 카르텔 혁파 [신진욱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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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21. 오후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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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이 지난 4월5일 오후 서울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연 ‘승리의 날 범시민대행진’에서 참석자들이 민주주의 승리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10월18일에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권에 항의하여 ‘왕은 없다’는 뜻의 ‘노 킹스’(No Kings) 시위가 2600여개 도시에서 일어나, 700만명이 넘는 시민이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는 행진을 했다. 하지만 트럼프 정권은 시민들을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폭력 범죄자, 미국을 증오하는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다.

지금 미국 상황은 심각해 보인다. 단지 도널드 트럼프라는 한명의 독재자가 문제가 아니라, 백인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반민주적, 반인권적 극우 세력이 미국의 정치, 군사, 종교, 경제 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록 트럼프의 지지율은 최근 많이 떨어졌지만, 계급, 인종, 젠더 등 여러 이슈에서 사회가 갈라져 있고 민주 세력이 압도적 다수가 되지 못한다. 그 결과, ‘독재 대 시민’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지 못하고 ‘독재냐 내전이냐’라는 절망적 선택지 앞에서 불안이 퍼져 있다.

그래서 이번 노 킹스 시위 같은 시민행동이 과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하나인 레이철 매도는 시위 전날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적 저항이 효과가 있는지,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은 한국인들에게 물어보세요. 시민들의 비폭력 시위로 계엄을 끝내고 이를 시도한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미국의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들의 글과 방송에서 ‘한국을 보라’라는 말을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독재를 막는 데 성공한 시민행동의 사례를 상기하는 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한국 시민들의 용기 있고 성숙한 행동이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 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시민들의 ‘빛의 혁명’은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세계의 많은 곳에서 빛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국내로 눈을 돌려 보면, 한국에 있는 것은 민주적 시민들의 결집력만이 아니다. 또한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비민주적 국가엘리트들이 이 나라에 있다. 극우가 창궐하는 시대라지만,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이 자국민들을 물건처럼 ‘수거’해서 감금, 살육할 계획을 짜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수십년간 축적된 민주적 시민들의 힘과, 극복되지 않은 비민주적 국가엘리트가 공존하는 이 극단적 이중성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회복력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구조적 토대다.

이런 대조는 지난 헌정 위기 국면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계엄 직후에 5만명이 넘는 청소년이 실명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시국선언을 했고, 또 수만명의 노동자, 수만명의 대학생, 그리고 연구자, 성직자, 언론인들이 자기 이름을 내놓고 시국선언을 했다. 윤석열이 돌아와서 다시 계엄을 할지도 모르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많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섰다.

하지만 단 한명의 장관도 대통령의 격노와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엄은 절대 안 된다고 맞서지 않았다. 단 한명의 판사도 헌정과 법치를 수호하기 위한 공적 행위에 나서지 않았다. 단 한명의 장성도 계엄 실행을 막기 위해 군인의 명예를 걸고 막아서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가엘리트들의 이러한 비겁함과 비민주성, 기회주의, 공적 책임감의 부재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탄핵과 대선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부, 군, 검찰, 법원의 고위직들이 지난 내란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관여했으며, 얼마나 안이하게 대처했는지가 계속 새로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위태로운 상태에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계엄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금은 폭력적 힘들에 대한 사회의 견제력이 작동하고 있지만, 미래에 국가가 또다시 민주주의와 시민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내란 종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흔히 ‘엄벌이냐 포용이냐?’ ‘개혁이냐 협치냐?’를 묻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지다. 중요한 것은 모든 행위의 목적을 우리 정치공동체의 근본 가치에 비추어 규정하는 일이다. 그 근본 가치란 선거, 법치, 헌법, 보편적 인권을 포함하는 광의의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여, 다시는 독재, 쿠데타, 군의 정치 개입, 국가의 사유화, 인권 파괴의 흉악한 계획이 가능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란의 종식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여러 수사, 청문회, 재판과 사회적 토론의 의의는 단지 내란에 관여한 자들이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한다는 응보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그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헌법이 우리 사회의 신성한 불가침의 약속이며, 그것을 공격하거나 거기에 동조하는 것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국가엘리트들이 어떻게 내란을 예비하고 실행했는지를 규명함으로써, 국가민주화를 위한 대안을 구체화할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어야 한다.

윤석열이라는 광인 하나 때문에 쿠데타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사령관들을 지휘해서 군을 일으켰고,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화기애애하게 계엄 회의를 하고 있었으며,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은 계엄이 불법인 줄 모른 척했다. 지귀연 부장판사는 딱 한 사람한테만 구속 일수를 시간으로 계산해서 윤석열 구속을 취소했고, 심우정 전 검찰총장은 의외로 즉시항고를 포기해서 윤석열을 석방했으며, 조희대 대법원장은 대선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신속히 이재명 재판을 처리하고 파기환송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인가? 각자의 성공을 꿈꾼 이 많은 연주자의 협업이 없었다면 망국의 진혼곡은 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법규와 관행, 예외와 우연을 복잡하게 이야기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자신의 특권과 안위를 위해 헌정 유린, 인권 유린에 동참한 부패한 엘리트들의 카르텔이다. 이념과 당파를 떠나 이 구조를 혁파하고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 민주주의 회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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