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전 깜빡이 넣고 좌회전한다는데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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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21. 오후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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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미·일 순방 경제인 간담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구광모 엘지그룹 회장,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 겸 두산에너빌리티 회장. 연합뉴스


곽정수|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최근 4대 그룹 임원과 차 모임을 가졌다. 취재 자리는 아니었는데, 직업적 호기심을 자제 못 하고, “윤석열 정부 때와 비교하면 경영 환경이 어떠냐”는 질문을 했다. “지금이 훨씬 더 힘들다.”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윤석열 정부의 경제 성적은 최악이었다. 무리한 감세로 대규모 세수 감소를 자초하고, 경제가 어려운데도 정부의 재정 역할을 사실상 방기했다. 급기야 반민주적 계엄 선포로 나라 경제와 기업 경영을 모두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이재명 정부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라며 실용적 친기업 정책 노선을 천명한 만큼 기업들로서는 기대를 걸 만하다. 형법상 배임죄 폐지, 경제 관련 형사처벌 완화, 인공지능(AI) 투자를 위한 금산분리 완화 추진은 진보 성향 시민단체나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기업들은 “이재명 정부가 우회전 깜빡이를 넣고 좌회전한다”고 말한다.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등을 담은 1·2차 상법 개정,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위한 3차 상법 개정 추진,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한 노란봉투법,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제재 강화, 법인세 인상, 정년 연장, 청년 일자리 확대, 주 4.5일제 등. 기업들이 꼽는 사례는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모두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경영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합리적인 기업인이라면 현 정부의 기업 정책들이 개별적으로는 모두 나름의 명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한꺼번에 밀어붙이면 기업이 견딜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여러 질병을 동시에 앓고 있는 중환자를 가정해보자. 유능한 의사라면 치료가 가장 시급한 병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환자의 몸 상태를 보고 치료법을 선택한다. 기업들은 현 상황이 중환자와 비슷하다고 보는 것 같다. 밖에서 미국의 관세 폭탄, 중국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쌍코피가 터졌는데, 안에서도 압박이 심하니 사면초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의 기업 정책은 결코 새롭게 들고나온 게 아니다. 대부분 오래전부터 논의됐지만, 기업들의 완강한 반대로 계속 미뤄져온 숙제들이다. 대주주의 사익 추구로 수많은 소액주주가 피눈물을 흘리고, 산업 현장에서 매일 노동자들이 귀중한 생명을 잃는 비극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기업들은 그동안 진정으로 개선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경영 안정성을 해친다거나, 경영 부담이 크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만 낭비했다. ‘자승자박’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기업도 사회와 환경이 요구하는 변화와 개혁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상법 개정에 반발하지만, 코스피는 그 기대감으로 3800선을 가뿐히 넘어 4000을 향해 달리고 있다. 시장은 이미 기업이 갈 길을 보여준 것이다. 기업은 국민과 정부가 공감할 수 있고, 실행 의지가 담긴 자율개혁 추진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정부와 국회도 법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없어진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기업지배구조 코드와 스튜어드십 코드 같은 연성 규범 준수를 통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자본시장 선진화를 이뤘는데, 우리도 못 할 게 없지 않나?

흔히 개혁의 성패는 정권 초기에 결정 난다고 한다. 정권이 힘이 있을 때 밀어붙여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컸던 만큼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다. 각 분야에서 주문과 요청이 쏟아진다. 하지만 모든 개혁 과제와 요구를 일시에 해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량에 한계가 있다. 이재명 정부가 첫발부터 부동산 불안으로 흔들린다. 겨우 출범 5개월째인데 벌써 세번째 대책이 나왔다. 하지만 별무신통이다.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면 정권 전체가 힘을 잃고 모든 개혁이 물 건너갈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재앙’을 되풀이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지금이라도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123개 국정과제 중에서 직접 챙기는 최우선 과제를 5대 국정 목표별로 하나씩 선정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모두가 잘사는 균형 성장’에서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주택 공급 확대와 주거복지 실현(부동산)을 최우선 과제로 해야 한다. 또 ‘국민이 하나 되는 정치’에서 검찰개혁을, ‘세계를 이끄는 혁신경제’에서 코리아 프리미엄을 향한 자본시장 혁신을, ‘기본이 튼튼한 사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산업안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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