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말은 알쏭달쏭한 데가 있었다.
“밥 주지, 국 주지, 고기 주지. 담배도 주고, 내복도 주고, 약도 뭉텅이로 줘. 잘해주더라고.”
긴가민가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뜨신 물 받아서 목욕시켜주겠다, 잘 때는 이불 깔아주겠다, 일어나면 이불 개어 주겠다, 날 춥다고 쉐타(스웨터) 사주겠다, 계속 있고 싶더라고.”
아이의 말투를 닮은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오기 싫었는데, 그냥 있을라 했는데, 이동현이 돈을 내는 바람에.”
동네 주민과 이야기하느라 걸음을 늦춘 동현(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이 대화를 마치고 골목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나왔더니만 이동현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골목 입구까지 먼저 걸어나간 할아버지가 동현을 기다리며 해죽 웃었다.
대개는 동현이 할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때로는 할아버지도 동현을 기다렸다. 기다림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정말 잘 해줬는지, 정말 나오기 싫었는지, 알쏭달쏭 긴가민가한 할아버지 말에 동현이 싱긋 웃었다. 동현이 보석 출소하는 할아버지를 구치소 앞에서 기다려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은 달랐다. 동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자질하듯 참았던 말을 꺼냈다.
“아휴, 죽는 줄 알았어.”
한겨울의 구치소를 나오며 그 말을 했던 할아버지가 한여름 동네 골목에선 “나오기 싫더라”며 장난 같은 말을 섞었다. 지팡이에 몸을 싣고 한발 한발 내딛는 할아버지 어깨에서 백발의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할아버지는 검은 머리였을 때부터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라고 불러달라”며 아저씨 나이에 일찌감치 할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그때나, 진짜 할아버지가 된 지금이나, 그의 팔다리는 여치처럼 마르고 야위었다. 동현이 비상등을 켜고 세워둔 트럭에 할아버지를 태우고 복잡한 골목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가족관계 아무것도 없어.”
야학에서 배운 대로 이름 석자를 가족관계증명서 신청 서류에 또박또박 적던 할아버지가 또박또박 말했다.
“고아야 고아.”
할아버지의 하이톤 발성이 덥고 나른한 오후의 주민센터를 꼬집듯 깨웠다. 소리의 출처를 찾는 눈길들이 소리 없이 할아버지에게 달라붙었다.
구속으로 끊긴 할아버지의 장애연금과 수당을 재신청하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보석으로 나왔을 땐 생계·주거 급여까지 모두 취소돼 있었다. 회복 절차를 밟으려면 상실한 ‘장애인 자격’부터 다시 얻어야 했다. 진료, 검사와 심사를 거쳐 결과(‘심한 장애’)를 통보받기까지 10개월이 걸렸다. “임상심리 검사상 지능지수 46으로 일상생활의 단순한 행동을 훈련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할아버지는 정의됐다. 신청서가 처리되는 동안 동현이 종이에 숫자를 적으며 설명했다.
“할아버지, 봐요. 장애연금이 42만4810원이야. 장애수당 6만원도 다시 받을 수 있어.”
숫자를 따라 읽던 할아버지가 “옛날에는 160만원 나왔다”며 아쉬워했다. 동현은 “옛날에도 그렇게는 안 됐다”며 계산을 해 보였다.
“생계급여 71만원에다 주거급여 20만원을 보태도….”
‘옛날’과 ‘지금’ 사이에 ‘그날’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날(2023년 8월17일)을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 열었더니 나 잡아가려고 엄청 많은 경찰들이 우르르 집으로 들어온 날”로 기억했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의 시간도 우르르 몰려왔다 몰려갔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대학로 흉기난동범’으로 긴급체포됐다.
“할아버지, 에너지바우처도 신청할까?”
취약계층 복지 전문가이기도 한 동현은 할아버지가 지원받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라도 빠뜨릴까 꼼꼼히 챙겼다.
“에너지바우처가 뭐야?”
“여름에 전기요금 깎아주고 겨울에 가스요금 깎아주는 거.”
“카드 요금 안 날아오던데.”
“카드 요금은 원래 안 날아와.”
할아버지가 신청서에 이름을 적는 동안 직원이 다른 서류를 건넸다.
“이건 활동지원서비스 신청서예요. 접수되면 국민연금공단에서 신청인 실사 한번 나갈 거예요.”
동현이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제 연락처를 같이 적어둘 테니 제가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날’ 경찰은 체포 과정에서 들은 할아버지의 말(‘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다 죽이려고 나갔다’)에 시시티브이 영상을 붙여 신속하게 언론에 뿌렸다. 신뢰관계인의 조력(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2조 ‘형사·사법 절차상 권리보장’)을 받지 못한 채 경찰 추궁에 답한 말이 뉴스를 타고 무차별 범죄의 증거로 퍼져나갔다. 여성들을 향한 강력범죄와 거짓 살인 예고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경찰청장이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한 시기였다. 애초 ‘우범자’로 기소를 검토하던 경찰이 갑자기 형량이 높은 ‘특수협박’으로 죄명을 변경했다. ‘살인 예비’까지 검토한다는 방침도 추가로 보도를 탔다. 1천명 넘는 시민이 불구속 재판을 호소하며 탄원했지만 구속 열흘 만에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에서 공개된 시시티브이 영상은 검찰 기소 내용과 달랐다. ‘범죄 사실’은 칼을 들고 30분간 거리를 활보했다고 했으나 영상에서 할아버지는 5분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피해자들에게 칼을 휘둘러 죽일 듯이 협박했다”는 검찰 공소장과 달리 영상엔 칼을 휘두르는 장면 자체가 없었다. 재판부는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할아버지 사건’은 공권력이 자기방어에 취약한 사람의 잘못을 잘못 이상으로 과장해 사회적 공포의 먹잇감으로 던져준 사례로 기록됐다. 한국 사회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다달이 연금, 수당 들어가면 어떻게 관리하실 거예요?”
지켜보고 있던 주민센터 팀장이 다가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동현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답했다.
“내가 반찬도 사 먹고요.”
팀장이 다시 물었다.
“돈 관리가 되세요? 지적장애가 있는 분은 급여 관리인 지정이 필요해요.”
동현이 말했다.
“딱히 지정할 필요는 없어요. 돈은 본인이 직접 찾으실 거예요.”
의심 어린 팀장의 표정에 “저희는 이분을 도와온 시민단체”라며 동현이 신분을 부연했다.
어쩌면 ‘그 일’ 정도는 할아버지가 살아오면서 겪어온 ‘그저 그런 일들’ 중 하나일 뿐인지도 몰랐다. 출생신고도 안 된 채 버려졌고, 아동보호소와 고아원으로 번갈아 보내졌고, 그러다 형제복지원으로까지 보내졌다. 탈출 뒤엔 밥과 잠자리를 구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그의 장애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공짜 노동을 약탈당했고, 길과 역에서 살며 얻은 병으로 자주 쓰러졌다.
“서울시 장애인 버스비 지원(월 최대 5만원) 사업도 신청할게요.”
직원에게 서류를 요청한 동현이 할아버지에게 ‘원리’를 설명하며 물었다.
“버스비로 3만원을 썼다고 해봐요. 다음달에 시에서 얼마를 입금해줄 것 같아?”
“3만원.”
“맞아. 그럼 6만원을 썼다면 얼마를 넣어줄까?”
“6만원.”
“아니, 5만원이야. 5만원까지만 채워주는 거야. 잘 이해해야 돼요.”
잘 이해해야 했다.
“깜빵 나오니까 다시 들어가고 싶더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할아버지의 말들은 그가 ‘그 시간’을 떠올리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지적장애인의 사실 혼돈이 아니라 고도의 블랙 유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말들을 꺼낼 때 할아버지의 마음에 잡히는 주름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작새.
할아버지의 화법에 익숙한 동현은 그 새를 연상했다. 할아버지의 말투는 깃털을 활짝 펼칠 때가 많았다. 몸집을 잔뜩 부풀렸지만 여치 같은 몸까지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겁을 주는 듯했으나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본능이었다. 약해서 평생 고통받았던 그가 ‘나는 약하지 않다’며 과장하고 위장했다. 악의 없는 고함을 지를 때도 팽팽한 풍선처럼 위협이 되진 않았다. 풍선은 커질수록 바늘 하나조차 이기지 못했다.
“할아버지, 아까 닭고기 공짜로 준다는데 받아오지.”
주민센터 볼일을 마친 뒤 동현과 할아버지는 푸드뱅크마켓(☞12회 ‘욕심 없는 남자’)에 다녀왔다. 골목 앞에 트럭을 세운 동현이 할아버지를 내려주며 아쉬운 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집에 있으니까.”
모두가 여분의 몫까지 챙기려 다툴 때 할아버지는 당장 필요한 것 이상은 탐내지 않았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빌라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을 따고 신발을 벗었다. 뜨거운 여름 오후에 두툼한 겨울 양말을 신고 있었다. 차곡차곡 껴입은 옷들을 벗으며 땀을 닦았다. 솜바지 안에 내복까지 챙겨 입었다. 덥고 답답했지만 “덕분에 덜 넘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입으면 잘 안 자빠지거든.”
여치 다리도 부풀리면 “무르팍 까지지 않고 걸을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믿었다. 장난처럼 ‘그의 평생에 발을 걸어온’ 세상이었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할아버지에겐 가장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