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활한 와인 산지이자 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권이다. 대서양으로 흐르는 가론(Garonne)강변의 항구로 로마 시대부터 부락을 이뤘고, 아메리카 발견 이후엔 구대륙의 무역 거점으로 번성했다. 배후엔 생테밀리옹(Saint-Émilion), 메독(Médoc), 그라브(Graves)처럼 기라성 같은 와인 산지가 있어 하항은 와인을 거래하는 상인과 배들로 붐볐다. 그 영화로움은 오늘날까지 보르도 시내의 가론강변을 따라 남아있다.
단단한 성채 같은 도시, 보르도
필자가 보르도와 처음 만난 건 스물일곱이던 2017년 가을이었다. 다니던 신문사를 관두고 프랑스 문학을 공부할 꿍꿍이를 품던 때였다. 예비 문학도는 회사 휴가 때마다 프랑스를 한 지역씩 돌며, 가장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물색했다. 사표를 내면, 그곳에서 프랑스어 어학연수를 받은 뒤 대학원에 진학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닿은 보르도는 웅장하고 굵직한 첫인상의 도시였다. 이 고장에선 가론강이 초승달 모양으로 굽이쳐 흘러, ‘달의 항구’(Port de la Lun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강을 따라서는 수세기에 걸쳐 세워진 석조 건물들이 성벽처럼 늘어서있다. 그 너머로는 고딕 성당들의 첨탑이 성채의 망루인 듯 도시를 굽어본다. 강변에서 바라보면 육중한 도시가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필자는 파리의 센강변 못지 않게 이 풍광에 압도됐다. 결국 이듬해 첫 직장에 사표를 냈고 보르도에서 3개월을 지냈다. 프랑스어 수업과 와인 수업을 함께 들으며 와인에도 본격적으로 빠져 들었다. 이 도시가 삶을 바꿨다고 필자는 믿는다.
수년 만에 보르도를 다시 찾은 건 지난달 여름 휴가 때였다. 그사이 필자는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을 새로 얻었다. 와인 취미도 깊어져,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실력 좋은 생산자들의 와인도 열심히 마셨다. 도시와의 재회와 이 고장의 와인을 고루 즐기는 게 이번 휴가의 목표였다. 필자는 생테밀리옹, 그라브의 샤토(Château·와인 생산자) 4곳을 찾아 양조장을 둘러보고 와인을 시음했다.
보르도 도심 옆 숨겨진 보석같은 샤토
이중 ‘샤토 레 카름 오브리옹’(Château Les Carmes Haut Brion)은 가론강이 흐르는 방향의 왼편(좌안) 평원인 그라브에 있는 포도원이다. 보르도에서는 가론강을 기준으로 와인 산지를 크게 좌안·우안으로 나눈다. 메독·그라브 지역이 속하는 좌안에선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뼈대로 메를로·카베르네 프랑 등을 섞어, 강건한 질감의 레드와인을 만든다. 그라브에선 소비뇽 블랑을 중심으로 빚은 화이트와인도 유명하다. 생테밀리옹·포므롤(Pomerol) 등의 생산지가 있는 우안에선 메를로 위주로 레드와인을 생산한다.
특히 레 카름 오브리옹의 지리적 입지는 독특하다. 이 샤토는 그라브 지역 포도원 중 유일하게 행정구역 상 보르도시에 속한다. 그만큼 보르도 도심에서 가깝다. 시내 숙소에서 샤토까지는 버스로 10분 남짓 걸렸다. 한때 필자도 자주 지나쳤던 교외 주택가 사이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유서깊은 포도원이 있을 줄이야. 비밀의 정원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샤토 문을 열었다.
샤토의 직원은 이 포도원의 역사가 158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소개했다. 당시 이 지역 영주였던 장 드 퐁탁 경이 카르멜 수도회에 땅을 기증했고, 이후 두 세기 동안 수도사들이 포도나무를 돌보며 와인을 빚었다. 샤토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국가에 몰수됐다가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뒤, 지금은 와인을 애호하는 프랑스 기업가가 소유하고 있다.
포도원 규모는 축구장 10개 넓이(7ha)로 좌안 다른 샤토들에 견주면 작다. 메독에선 포도원 하나가 수십ha에 달해 땅이 지평선에 닿아야 소유주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선 한쪽 담벼락에서 반대편 끝이 보였다. 대신 포도원 내부는 필자가 가본 어느 샤토보다 화려했다. 밭 한가운데엔 중세 귀족의 장원처럼 푸른 지붕을 얹은 석조 저택이 서있고, 그 아래로 하얀 말들이 이랑을 거닐며 땅을 갈고 있었다.
반면 와인을 숙성하는 양조장은 현대적인 외관을 자랑한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설계한 이 건물은 샤토의 저택과 대비되는 유선형의 외벽을 가졌다. 건물은 선박을 형상화했는데, 대항해시대 때부터 보르도에 영광을 가져다준 와인 무역을 기리기 위해서라 한다. 양조장 내부 역시 휘황했다. 샤토는 매년 세계 각국의 유명 예술가를 초빙해, 포도를 숙성하는 콘크리트 뱃(vat·대형 숙성 탱크)에 벽화를 그린다. 이 그림은 해당 빈티지의 와인병 뒷면에도 새겨진다. 양조장이자 갤러리인 셈이다.
강건한 와인을 온화하게 뒤바꾸는 과실미
이곳은 양조 방식에서도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포도를 숙성할 때 줄기를 전부 제거하지 않고 매년 40% 이상을 남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피노 누아 품종을 기르는 부르고뉴에선 줄기를 다 솎지 않고 양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보르도에선 포도 품종에 떫은 탄닌 성분이 많아 알갱이만 숙성 탱크에 넣어 발효한다. 줄기에서 비롯된 떫은 맛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샤토는 줄기의 탄닌으로 술에 골격감을 더하고, 허브 등 다채로운 향을 부각하는 쪽을 택했다.
대신 와인이 무거운 느낌만을 주지 않도록, 숙성 후반부에는 쥬스의 10% 정도를 오크통 대신 ‘암포라’(항아리)에 넣는다. 내부를 불로 그을린 오크통에만 숙성할 때보다 와인에 꽃내음과 신선함이 더해진다는 게 샤토 설명이었다. 이 역시 보르도 지역에서는 드문 시도다. 포도원의 규모가 작아 매년 같은 방식의 ‘공장제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런 노력의 진가는 와인의 향과 맛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이날 시음한 보틀은 샤토 레 카름 오브리옹 2018년 빈티지. 포도가 볕을 충분히 받고 자란 ‘풍년’의 와인이어서인지, 잔에는 완숙한 검은 자두와 체리향이 가득 피었다. 이어 한여름 절절 끓는 모래밭에서 올라오는 듯한 짙은 철분내, 연필심에서 나는 흑연 향이 매콤하게 섞였다. ‘만만하게’ 들이킬 술이 아니라고 일러두는 듯했다.
입속에서는 강건한 보르도 와인답게 질감이 두터웠다. 와인을 머금고 있으면 술이 혀를 무겁게 내리누른다는 느낌이 들 만큼, 비중이 높은 술이었다. 예의 광물성 향이 입안까지 이어지며 와인의 견고함을 부각했다.
놀라운 것은 그 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과실미였다. 자두에 더해 무화과 같은 눅진한 과실미가 입안을 즐겁게 하니, 와인의 인상을 밝게 뒤바꿨다. 산미 역시 뚜렷해 와인이 질감에 비해 둔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 민트 잎, 삼나무의 시원한 향이 뒤따라 경쾌한 인상까지 더한 것은 덤. 피니시(뒷맛)에서는 자두와 담뱃잎, 철분내음이 10초 이상 길게 남았다.
한 모금을 넘기는 동안에도 어둡던 와인의 표정이 미소짓듯 온화하게 바뀔 수 있다니. 이것이 좋은 밭의 힘이고 생산자의 실력일 것이다. 시음 노트에 끼적이며 레 카름 오브리옹의 투어를 마무리했다.
무뚝뚝한 이의 미소 같은
보르도 시내로 돌아오니 이날은 마침 매년 하지 절기(6월21일)마다 돌아오는 음악 축제였다. 거리와 광장에서 사람들은 가수, 연주자 또는 관객이 되어 축제를 즐길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져 자정이 되도록 여름밤을 즐길 터였다. 그 시간을 준비하는 이들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필자가 보르도에 처음 발 딛던 날부터 도시를 짝사랑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필자에게 보르도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웃는 도시다. 직선과 수직으로 짜인 높다란 구조물들 사이로 동화 속 같은 골목들이 숨어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저녁마다 흥청이며 떠든다. 잠시만이라도 이 고장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은 조바심에, 나는 이곳으로 돌아와 3달을 보냈던 것 같다.
문득 보르도라는 고장과 이 땅의 와인이 닮았다고 느꼈다. 단단하고 뻣뻣해 보이지만 한걸음 다가가면 웃음으로 맞아주는 이 도시와 와인. 무뚝뚝한 이의 미소가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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