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예인 명단 기록한 ‘신청’은 우리 역사이자 문화 자산”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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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10.02. 오후 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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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4대째 전통음악 맥 있는 정회천 전북대 명예교수
보성소리 맥을 4대째 이어온 정회천 명인. 정대하 기자

“신청은 우리의 역사였고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었어요. 집안의 내력을 미화하거나 (공개하기가) 조금 그렇다고 해서 그냥 사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국악 명가의 후예 정회천(68) 전북대 명예교수(한국음악과)는 지난달 18일 저녁 7시 나주시 나주신청문화관에서 만나 나주신청 내력이 적힌 가승보를 공개한 이유를 밝혔다. 이날 정 교수는 ‘흥겨운 나주소리-판 특별한 소리전’의 사회자 겸 고수로 참여하기 위해 나주를 방문했다. 그는 2019년 1월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요청을 받고 정씨 집안의 가계가 적힌 ‘가승보(家乘譜)’를 건넸다. 윤 감독은 2019년 1월 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정 명예교수 집안이 나주신청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신청은 과거 전통시대에 각종 연희와 공연을 담당하던 재인·광대·무부들의 조직을 말한다. 그는 “나주신청과 관련해 사회적 연구가 이뤄져 문화적인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주 정원길 가계의 가승보. 나주신청 선생안에 나오는 정원길, 정원실 형제의 이름이 보이며, 그 후예인 정재근, 정응민, 정권진의 이름도 나온다. 윤종호 예술감독 제공

이날 행사는 나주신청문화관 개관 5돌을 축하하는 무대였다. 축하 공연 전 나주신청 예인들의 행적과 보성소리의 연원을 조명하는 판소리 포럼이 열렸다. 이경엽 목포대 교수(국문학과)는 ‘나주신청 예인들의 활동과 그 의미’라는 주제의 논문에서 “나주신청은 19세기에 각종 문서와 선생안을 발간했는데, 나주신청 선생안에서 관심을 끄는 인물은 정원길(1834~1903), 정원실(1838~?) 형제”라고 말했다. 나주신청 예인들의 이름을 적은 선생안은 “신청 예인들과 지역 예술전통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정회천 전북대 명예교수(한국음악과). 정대하 기자

정씨 집안 가승보가 공개되면서 보성소리의 예술적 원천이 나주신청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원길은 박유전의 뒤를 이어 서편제의 초기 흐름을 이끌었던 정재근의 부친이고, 훗날 보성소리를 정립한 정씨 가계 예인들의 ‘대부’였던 셈이다. 이 교수는 “가승보 등 나주신청 관련 자료는 20세기 판소리사에서 가장 특별한 흐름인 보성소리가 나주신청에 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며 “정재근의 소리는 조카 정응민을 거쳐 보성소리로 확장됐고, 아들 정권진과 손자 정회석으로 이어져 국악 명가를 이뤘다”고 말했다.

정원길 정재근 정응민 정권진 등
보성소리 정립한 선조 가계 공개해
‘나주신청과 보성소리 관련성’ 보여줘


KBS 피디 10년 뒤 대학 강단으로
국악 대중화와 국악 교육에 열정
집안 소리보다 가야금과 고법에 매진
“판소리, 배웠지만 못 버티겠더군요”


정씨 가계가 보성으로 이주한 것은 경제적·사회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수는 “당시 (당골)무업에 토대를 둔 예인들은 인접 지역으로 이거하면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며 “정씨 집안 예인들이 나주를 떠나 장흥, 보성 등지로 이사한 것은 20세기 초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보성 회천 일부 마을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전에 장흥부에 속했다. 정 명예교수는 토론회에서 “(한양에서 활동하다가 낙향한 선대가) 신분적으로 ‘하대’를 당하니까 나주로 안 갔거나, 신청의 전통이 살아 있는 장흥으로 이주했을 가능성,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보성으로 옮겨간 정씨 가계는 서편제의 비조 박유전이 흥선대원군의 실각으로 보성으로 이거해 가르쳤던 소리인 강산제에 동편제를 보태 보성소리를 탄생시켰다. 최동현 군산대 명예교수는 “보성소리라는 말은 1982년 이국자의 ‘보성소리 심청가’라는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며 “보성소리는 동편제 김세종의 춘향가와 서편제 박유전의 심청가·수궁가·적벽가의 복합이다. 지역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예가 보성소리”라고 했다.

지난달 18일 저녁 7시 나주시 나주신청문화관에서 나주신청 옛 예인들을 추모하는 의례에서 윤종호 예술감독이 추모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이날 나주신청 예인들의 넋을 추모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나주신청 선생안을 모시고 진행하는 전통적인 추모의식을 복원해 올렸고, 소리꾼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가 무가 의례를 선보였다. 윤종호 감독은 재물과 복을 기원하며 지내는 고사에서 부르던 ‘고사소리’를 복원해 올렸다. 윤진철 명창(국가무형문화유산)이 중고제 소리 한 대목을 불렀다. 정 명예교수가 북채를 잡고 장단을 끌어가며 추임새를 넣었다.

정 명예교수는 집안의 소리보다 가야금과 판소리 고법에 매진했다. 그는 “성악(판소리)을 배웠지만 못 버티겠더라. 너무 힘들고 목도 아팠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함동정월 명인의 ‘무릎 제자’로 가야금을 배워 제자들에게 가야금 가락을 전승했다. 판소리 고법 분야에서 첫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였던 김명환 선생에게 고법을 배워 고법 전승교육사로 활동하고 있다. 보성소리 심청가는 그의 동생 정회석(62·국가무형유산) 명창이 잇고 있다.

1988년 전북대 국악과에 부임하기 전 한국방송(KBS) 예능프로듀서로 10년간 활동했던 그는 “미디어를 활용해 우리의 전통 소리와 장단, 몸짓을 전승”하는 국악 대중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80년대 방송에 출연한 가수 조용필에게 민요 한 곡을 부르도록 요청했다”며 “방송에서 불렀던 ‘한오백년’과 ‘강원도 아리랑’이 조용필의 앨범에도 실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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