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방지’ 공무원의 죽음이 남긴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김채운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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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9.05. 오전 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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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8일 세종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 김아무개(당시 51) 전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가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남긴 유서 일부. 김 전 국장 유족 제공


김채운 | 정치팀 기자

“내 몸뚱아리는 화장해서 뼛가루는 바람에 날려주세요. 어디에 흔적을 두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법과 논리의 무게보다 양심의 무게가 더 크다는 교훈을 모든 공직자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초, 저는 쓰인 지 1년이 다 된 유서를 보도했습니다. 유서를 쓴 이는 고 김아무개(당시 51) 당시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 그는 지난해 6월 권익위가 ‘김건희 명품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제재 규정이 없다”며 종결 처리한 지 두달 뒤인 지난해 8월8일, 세종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김 전 국장이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남긴 메모 형식의 유서에는 당시 권익위 결정에 괴로워하는 그의 속앓이가 가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인은 20년 동안 권익위에서 일하며 부패 방지 분야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영국에서 부패 방지 분야 석사 학위를 딴 뒤 돌아와, 일을 하면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습니다. ‘김영란법’으로 잘 알려진 청탁금지법 제정에도 참여했고, 사실상 ‘공직 인생을 바칠 정도’로 부패 방지 제도 개선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당시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동료와 가족들은 그에 대해 “누구보다 대쪽 같고 선비 정신이 투철했다”, “일에 엄청난 열정과 전문성을 가진 인정받는 직원이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 전 국장의 꿈은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돌며 부패 방지 컨설팅을 통해 우리나라의 공직 청렴도를 개선하고, 반부패 법률의 성공적인 안착을 이뤄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반부패 전담 기관인 권익위가 대통령 부인의 명품 수수에 ‘위법 사항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니, 고인의 황망함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숨진 채 발견되기 바로 전날까지도 청탁금지법 개정을 위한 전국 간담회에 참석했던 그는, 결국 “잘못은 목숨으로 치르려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뿐이고요. 왜 제가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본인이 종결 결정을 한 것도 아니었건만, 누군가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지난해 8월9일 오후 세종시 도담동 세종충남대병원 쉴낙원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아무개(당시 51)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의 빈소 모습. 김채운 기자

김 전 국장은 마지막까지도 부패 방지 제도의 본질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김건희 명품가방 수수 사건’을 언급한 뒤 “법 문언도 중요하지만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처리도 중요하다고 봅니다”라며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가진 자와 권력자에겐 더 엄격하고 약자에겐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법률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또 “5개 반부패 법률의 정치적 악용은 그만두어야 합니다”라며 “이 소중한 제도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닌지 모두 생각하고 고민해 주십시오”라고도 적었습니다. ‘5개 반부패 법률’이란 청탁금지법·이해충돌방지법·공익신고자보호법·공무원행동강령·공공재정환수법으로, 우리나라 부패 방지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법들입니다.

김 전 국장의 1주기를 맞아 유서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분야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 덕에 이 세상이 굴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고요. 오늘 나의 일상이 무탈한 것이, 어쩌면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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