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1일 오후 6시쯤 전북 남원시 도통동 한 교차로 인근 횡단보도 앞 인도에서 가로 2m, 세로 2.5~3m, 깊이 1.5~2m 땅 꺼짐(싱크홀) 사고가 발생해 이 길을 지나던 박모(46)씨가 추락해 다쳤다. 사진은 사고 현장 모습. 사진 전북특별자치도소방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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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 남원시장 고소
올여름 전북 남원에서 발생한 땅 꺼짐(싱크홀) 사고가 경찰 수사와 법원 소송으로 번졌다. 지난 6월 21일 오후 6시쯤 남원시 도통동 한 교차로 인근 횡단보도 앞 인도에서 가로 2m, 세로 2.5~3m 구멍이 생겨 2m 아래로 추락한 박모(46)씨가 지난달 4일 최경식 남원시장과 시 하수시설팀장 등 3명을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남원경찰서에 고소하면서다. 전주에 사는 박씨는 당시 아내(40대)와 초등학교 4학년 아들(10)과 함께 80대 노부모가 사는 남원을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박씨 고소장엔 “최 시장 등이 지하 시설물 관리와 보행 안전 점검 의무를 다하지 않아 싱크홀이 발생해 고소인이 추락,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사고로 박씨는 팔다리·허리 등을 다쳐 15일간 입원했다. 이후 불면증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박씨는 22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사고 현장과 유사한 상황에서 폐쇄·고소 공포를 느끼고, 현기증·예기 불안(실패할 것이란 예감 때문에 생기는 신경증) 때문에 생업(영상 촬영)과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난 6월 21일 남원에서 발생한 땅 꺼짐(싱크홀) 사고로 다친 박모(46)씨. 인도가 2m 아래로 무너지면서 오른쪽 팔꿈치와 왼쪽 다리 피부가 벗겨지고 파여 피가 나고 있다. 사진 박씨
남원에서 발생한 땅 꺼짐(싱크홀) 사고로 다친 박모(46)씨. 사진 박씨
지난 6월 21일 '남원 싱크홀 사고'로 팔다리 등을 다친 박모(46)씨가 사고 당일 남원의료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은 모습. 사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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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싱크홀도 사회 재난”
남원시는 하수도 오수 관로(구정물을 빼기 위해 설치한 관)와 우수(빗물) 박스 노후화로 인한 파손으로 토사가 유입돼 싱크홀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고 직후 2200만원을 들여 관로를 교체하는 등 지하 시설물 복구 작업을 마쳤다. 영조물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한 남원시는 보험사를 통해 손해액을 산정 중이다.
최 시장 등을 입건한 남원경찰서는 이달 2일부터 싱크홀이 사회 재난 유형에 포함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16일 화재·붕괴·폭발·교통사고 등에 이어 땅 꺼짐 사고도 사회 재난으로 인정하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시행령’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은 싱크홀로 인한 인명·재산 피해가 급증했지만 사회 재난으로 분류되지 않아 시민안전보험 적용 등이 애매한 현실을 고려해 법적 보상 근거를 마련하고 예방 체계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게 행안부 설명이다. 시민안전보험은 지자체가 주민을 대신해 보험사와 계약해 재난·사고 피해를 보상하는 제도다. 보험 보장 항목에 재난관리법에 정의된 사회 재난만 지자체가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얼마 전까지 싱크홀 피해는 보상 대상이 아니었다.
지난 6월 21일 전북 남원시 도통동 한 교차로 인근 횡단보도 앞 인도에서 발생한 '땅 꺼짐(싱크홀)' 사고로 생긴 구멍. 사고 직후 시민 도움으로 싱크홀에서 빠져 나온 박모(46)씨가 직접 사진을 찍었다. 사진 박씨
지난 6월 22일 남원시가 전날 싱크홀 사고가 발생한 도통동 한 식당 앞에서 굴착기와 인력 등을 동원해 응급 복구 작업 중이다. 사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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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과 업무상 과실치상 연결 무리” 시각도
현재까지 국내에서 싱크홀 사고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단체장이 형사 처벌을 받은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시민과 함께 부산연대’는 지난 6월 9일 1년간 14차례 싱크홀이 발생한 부산도시철도 사상~하단선 공사와 관련해 부산교통공사 이병진 사장을 비롯한 책임자 등을 업무상 과실치상·직무유기 등 혐의로 부산경찰청에 고발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번 개정안과 싱크홀 관련 업무상 과실치상 사건을 연관 짓는 건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이민호 법무법인 모악 대표변호사는 “정부와 지자체 등이 지반 침하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관리 계획을 세우고 예방해야 하지만, 이미 발생한 사건에 소급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며 “남원 싱크홀 사고는 기존 업무상 과실치상 법리에 따라 판단할 텐데, 지반 침하가 여러 차례 발생하는 등 예견 가능성이 분명한데도 이를 방치하는 등의 해태(게으름)가 있었는지 여부가 혐의 유무를 좌우할 것”이라고 했다.
최경식 남원시장이 지난 4월 10일 서울 용산구 피스앤파크 컨벤션 1층 파크홀에서 열린 제95회 춘향제 프레스데이 & 앰버서더 네트워킹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남원에서 발생한 싱크홀 사고 피해자 박모(46)씨가 지난달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고소하면서 경찰 수사 대상이 됐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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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일부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 제기
이와 별도로 남원시는 지난 8월 말 서울 소재 로펌을 통해 박씨를 상대로 일부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오는 27일 전주지법 민사8단독 박성수 판사 심리로 첫 조정 기일이 열린다. 남원시는 “신청인(남원시)은 피신청인(박씨)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적절한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으나 피신청인이 상당·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려운 고액을 요구한다”며 법원에 조정을 신청했다. 남원시는 손해배상금이 400만원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박씨는 “이번 사고는 남원시의 중대한 과실에 기인한 사회 재난성 사고”라며 “그런데도 남원시가 어떠한 사과나 구체적 협의도 없이 소송부터 제기한 건 피해자를 또다시 압박하는 2차 가해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금전 분쟁이 아니라 공공기관의 공유 시설물 관리 소홀과 부적절한 대응”이라는 취지다.
지난 6월 22일 남원시가 전날 싱크홀 사고가 발생한 도통동 한 식당 앞에서 굴착기와 인력 등을 동원해 응급 복구 작업 중이다. 사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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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2차 가해”…시 “소통 미흡”
박씨는 그러면서 “손해사정사에게 구체적인 금액을 요구한 적도 없는데 과도하다고 단정 짓는 건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실제 치료비와 정신적 손해, 가족의 충격 등을 고려한 합리적 보상을 원할 뿐”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진료비와 대물 피해 등으로만 1000만원 이상 손해를 봤다는 게 박씨 설명이다.
남원시 관계자는 “남원시가 관리하는 시설에서 발생한 사고인 만큼 관련 규정에 따라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소통 과정에서 일부 미흡했던 것 같다”며 “다시는 싱크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하 시설물 관리에 힘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토부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전국에서 지반 침하(면적 1㎡ 또는 깊이 1m로 땅이 내려앉는 것) 사고는 941건 발생했다. 일반 지반 침하 사고의 59.2%(2022~2023년 기준)가 상·하수관 등 땅속 매설물 손상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남원=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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