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데만 15년이 걸리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를 대대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밝히면서 국내 원전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사실상 원전 추가 건설 계획을 철회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 어렵게 되살린 원전 생태계가 다시 무너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대형 원전 2기 건설 계획 백지화 우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한 ‘이재명정부 출범 100일 기자회견’에서 “인공지능(AI)을 위한 데이터센터 등에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니 원전을 짓자고 하는데 기본적인 맹점이 있다”면서 “원전을 짓는 데 최소 15년이 걸리고, 지을 곳도 지으려다 중단한 한 곳 빼고는 없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금 짓기 시작해도 10년 지나 지을까 말까인데 그게 대책인가”라며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소형모듈원전(SMR)에 대해서도 “기술 개발이 아직 안 됐다”고 일축했다.
대신 이 대통령은 “신속하게 공급할 방법은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다. 1~2년이면 되는 태양광과 풍력을 대대적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재계에서는 ‘새 원전 건설을 사실상 백지화하겠다는 의미’라는 분석이 나온다.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쇼크에서 벗어나 최근 몇 년 새 각종 투자, 인력 확충으로 겨우 생태계를 되살린 원전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탈원전 시즌2’가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단 이 대통령 발언부터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적잖다. 이 대통령이 원전을 건설하는 데 최소 15년이 소요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10년 내 건설한 사례가 적잖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국내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는 1971년 11월 착공해 약 6년 만인 1978년 4월 준공됐다. 2016년 6월 첫 삽을 뜬 새울 3호기는 내년 2월 가동을 앞뒀고, 지난해 9월 착공한 신한울 3호기도 8년이 지난 2032년 11월 가동이 목표다. “공론화 절차나 인허가 등을 뺀 원전 건설 기간만 보면 10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목소리다.
원전 부지가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내년 새울 3, 4호기가 들어설 울산 울주군 주민들은 오히려 원전 유치에 나서고 있다. 2023년 당시엔 울주군 주민 과반수가 새울 5, 6호기 건설에 찬성하기도 했다. 당초 ‘천지 원자력발전소’를 짓기로 했다가 탈원전 여파로 건설 계획이 전면 백지화된 경북 영덕군도 유력한 신규 원전 후보지 중 하나로 꼽힌다. 2021년 원전 건설이 취소됐을 당시 영덕군은 경제적 피해가 3조원을 웃돈다며 주민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SMR을 두고서도 “기술 개발이 안 됐다”고 못 박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혁신형 SMR 기술개발사업단’을 꾸리고 연말을 목표로 첫 단계인 표준 설계 연구를 진행 중이다. 기술 개발의 첫 단추가 연내에 마무리될 계획이라는 의미다. 내년부터는 인허가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두산에너빌리티, 현대건설, DL이앤씨 등 국내 업체들도 글로벌 SMR 기업과 손잡고 SMR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여의도 10배 땅 태양광 깔아야
이 대통령 발언을 두고 논란이 거센 가운데, 탈원전 정책이 현실화될 경우 원자력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찮을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 2월 확정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38년까지 2.8GW 용량의 대형 원전 2기와 SMR 1기를 건설하기로 했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담긴 것은 신한울 3, 4호기 건설 계획이 반영된 2015년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이후 10년 만이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에너지 전문가들이 모여 향후 15년간의 전력 수급 전망, 구상을 분석해 꾸린 국가 최상위 전력 계획이다.
하지만 만약 대형 원전 2기분 전기를 태양광으로 대체할 경우, 여의도(2.9㎢)의 10배에 달하는 부지에 태양광 패널을 깔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1㎾ 전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태양광 패널 면적을 9.9㎡로 가정해, 대형 원전 2기의 설비용량(2800㎿)을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부지를 계산한 결과다. 그만큼 신재생에너지 의존도가 훨씬 높아지는 셈이다.
이 대통령 발언대로 대형 원전 2기, SMR 1기 건설 계획조차 백지화되면 사실상 원전 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진행 중인 대형 원전 개발은 2033년 모두 종료돼 신규 프로젝트가 중단될 경우 국내 원전 기업들은 일자리 절벽에 부딪히게 된다. 새 원전을 짓지 않으면 2032~2033년 완공되는 신한울 3, 4호기 공사 이후 원전 업계에 일감이 없어진다. 국내 원전 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원전 유지, 보수 외에는 기약할 수 없는 수출 소식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신규 원전 건설이 어려워질 경우 전기요금이 대폭 오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1㎾ 전기를 생산하는 데 원자력은 52원이 들지만 재생에너지는 271원으로 5배 넘게 차이가 난다. 전기요금이 치솟으면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기업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올해 106GW인 국내 에너지 수요는 2030년 118.1GW, 2038년 145.6GW로 커진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수급하고,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다면 전기요금이 치솟고 제조 업체들은 한국을 떠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의 탈원전 방침은 미국, 유럽 등 글로벌 국가들이 친원전 정책으로 돌아선 추세와도 역행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출범 이후 ‘원전 르네상스’를 공식 선언하면서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2050년까지 약 100GW인 원전 설비 용량을 400GW로 확대하는 계획을 밝혔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원전을 적극 활용하는 중이다.
“태양광, 풍력 설비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재생에너지 확대는 국부 유출과 국내 산업 생태계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AI·반도체 등 첨단 산업 성장에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인데 불안정한 에너지원 의존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위험한 선택이다. 10년 뒤 전력 수요에 대비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국원자력학회가 최근 내놓은 성명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8호 (2025.09.24~09.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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