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미, 250억달러씩 8년 분납 투자 논의

박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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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투자 3500억달러 중 나머지는 신용 보증 추진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을 위해 양국 간에 한국이 매년 250억달러씩 8년간 2000억달러(약 286조원)의 대미 투자를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워싱턴 소식통은 이날 “3500억달러 중 1500억달러는 신용 보증 등으로 돌리고, 2000억달러를 한국이 출자하는 방안”이라며 “이런 안은 미국 측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용범(왼쪽)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한미 관세 협상의 후속 논의를 위해 출국하기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성원 기자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임기(2029년 1월까지) 내에 3500억달러를 ‘선불’하라는 기존 요구보다 한국의 지분 투자액이 줄어들고 기간이 늘어난 방안이다. 하지만 매년 250억달러도 한국이 외환시장 충격 없이 연간 조달 가능한 외환 규모(150억~200억달러)를 상회하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이 같은 대미 투자 후속 논의를 위해 이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19일 귀국한 김 실장은 사흘, 20일 귀국한 김 장관은 이틀 만에 다시 방미 길에 올랐다. 29일로 예상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일주일 남기고 ‘막바지 협상’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김 실장 등은 전날 이재명 대통령에게 지난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을 만나 협상한 내용 등을 보고하고, 협상 지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김 실장은 이날 “APEC이라는 특정 시점 때문에 중요한 쟁점 부분을 남기고 부분 합의된 안(案)만 가지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건 정부에서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이 8년에 걸쳐 매년 250억달러씩 2000억달러를 ‘분산 투자’하는 방안이 논의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3500억달러 선불‘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미국 정부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220억달러로, 3500억달러는 83% 정도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논의 중인 ’분산 투자’ 방안은 일시불이 아닌 분납인 데다 현금 투자 액수도 줄어든 것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20일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미국이 여전히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는가’란 질문을 받고 “거기까지는 아니다”라며 “미국 측이 상당 부분 우리 의견을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2000억달러도 전액 현금 투자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이고, 투자처 선정과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할지 등도 문제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22일 출국 전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원하는 최종안이 아니고 우리나라 국익에 최선이 되는 협상안을 만들기 위해 간다”고 했다. 이어 “많은 쟁점에 대해 양국 간에 의견이 좁혀졌는데 한두 가지 팽팽히 대립하는 그런 분야가 있다”며 “그런 쟁점에서 우리 국익에 맞는 타결안을 만들기 위해 다시 나가게 됐다”고 했다.

◊정부의 ‘가용 외환’ 총동원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1년 사이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150억달러에서 200억달러 사이”라고 말했다. ‘매년 250억달러’는 한국의 가용 외환을 최대치로 동원해야 조달할 수 있는 금액으로 한국 정부에는 큰 부담이 된다.

다만 미국도 한국의 가용 외환 범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한국에서 받아낼 수 있는 최대치’로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권 관계자는 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미국에 다녀온 김용범 정책실장 등의 보고를 받고 크게 화를 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미국이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고 있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8년간 2000억달러’가 전액 현금 요구인지, 일부라도 상환 가능성이 있는 차관이 포함될지도 미지수다. 투자 수익 배분도 중요한 쟁점이다. 김 실장은 지난달 말 미국이 대미 투자 수익을 한국 10%, 미국 90%의 비율로 나눌 것을 요구했다고 공개한 적 있다. 이런 투자 수익 배분율에 대해서도 양국 간 타협이 이뤄져야 양해각서(MOU) 작성이 가능하다. 미국과 일본이 지난달 4일 발표한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미·일 간에는 투자금 회수 때까지는 미국과 일본이 50%씩 수익을 나누고, 투자금 회수 후에는 미국이 수익의 90%를 갖는 것으로 돼 있다. 한국은 투자금 회수 때까지는 90% 수익을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이 현금 투자 비중을 낮추는 조건으로 우리에게도 일본과 같은 조건을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 ‘순방 세리머니’ 원해

‘250억달러씩 8년간 투자’란 방안이 등장한 배경에는 26일 시작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 첫 아시아 순방이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9~30일 한국 국빈 방한에 앞서 말레이시아와 일본을 방문한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회담하며 자신의 대미 투자 유치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예정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 직후 한국에 오기 때문에 거액의 대미 투자 계획이 포함된 ‘합의문’을 발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실장은 “APEC이라는 특정 시점 때문에 중요한 쟁점 부분을 남기고 부분 합의된 안(案)만 가지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건 정부에서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서 “7월 31일 양국 간 타결한 안을 실행할 수 있는 MOU 전체에 대해 양국이 합의해야 성과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미 정상회담에 맞추기 위해 일부 사안에 대한 합의 사항만을 담은 MOU 등을 무리하게 발표하지는 않겠다는 취지다.

그러면서도 김 실장은 “지난 8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잠정적으로 합의된 큰 성과들이 많이 있고, 여기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조율 중인 안보 이슈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며 “통상에 대한 MOU 부분이 완료되면 통상 분야도 발표되고 그 성과들도 한꺼번에 대외적으로 발표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과 김 장관은 미국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을 만나는 당일치기 일정 뒤 곧장 귀국할 예정이다. 이번에도 한미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APEC 이후까지 협상이 장기화될 수 있다. 김 실장은 이날 “협상이라는 게 상대방도 있고 시시때때로 상황이 변하는 만큼 예단해서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현재 상황은 미국이 기존 입장을 바꿔 우리가 제시한 안을 얼마만큼 받아들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며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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