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일본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는 취임과 동시에 굵직한 외교 무대에 잇따라 오르게 된다. 취임 5일 만인 26~27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27~29일 일본을 찾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회담, 31일~11월 1일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까지 줄줄이 예정된 양자·다자 정상회담을 소화해야 한다. 그동안 역사 문제에 대한 강경 우익 발언으로 주변국의 우려를 사왔던 다카이치가 향후 총리로서 어떤 대외 정책을 펼칠지 주목된다.
다카이치는 의원 시절 2차 대전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해 왔고, 식민 지배와 위안부 등에 대한 반성이 불필요하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일본 내에선 다카이치가 총리가 된 이후에도 강경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당장은 일본이 처한 안보 현실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팽창주의,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 안보 위협에서 미국 동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한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다카이치 내각의 안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카이치의 첫 과제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와 밀월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일본 언론들은 “다카이치 총리의 첫 지시는 ‘3대 안보 문서 개정’일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견제와 방위비 증액에 보조를 맞춘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22년 말 3대 안보 문서에서 2027년까지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인 방위비를 2%로 증액하는 내용을 담았다. 다카이치 총리가 안보 문서의 조기 개정에 나서, 3~3.5% 수준을 바라는 미국의 요구에 최대한 접근하는 모양새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다카이치는 “일·미 동맹은 우리 안전 보장의 축”이라며 “미국의 인도 태평양 전략에서도 우리는 불가결한 파트너라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면 일·미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정상 간 신뢰 관계를 깊게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과 협력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다카이치는 그동안 지난 9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에 눈치 보지 말고 장관을 보내자”고 하거나 2022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다 말다 하니 상대(한국)가 기어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거친 발언을 자주 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만 위협, 러시아·북한의 밀착 등 대외 긴장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한일 관계를 깨는 행보는 자제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카이치는 이날 회견에서 “일한(한일) 관계는 지금까지 양국 정권 사이에서 발전했고, 거기에 기반해 더욱 미래 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회담을 희망하며, 제대로 의사소통해 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미·한 연계, 특히 북한에 대한 대응에서도 안보와 경제 안전 보장에서 협력이 필요하며, 전략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싶다”고 했다. 다카이치는 한국의 우려를 의식한 듯 “한국에서 일부 우려가 있다고 했지만, 나는 한국의 김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도 보고 있다”면서 “앞으로 한국 대통령과 만날 날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다카이치는 매년 가을 예대제 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으나,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직후 열린 예대제엔 참배하지 않고 공물만 바쳤다. 취임 회견에서도 “APEC은 중요한 지역”이라면서 “룰에 기반한 자유롭고 공정한 지역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정상들에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명예교수는 “야당 시절엔 반일 발언을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선 달라진 이재명 대통령처럼 다카이치 총리도 달라질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예측 불가능한 국제 환경 속에서 일본에는 한국이, 한국에는 일본이 가장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는 걸 다카이치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등이 먼저 불거질 대목은 중국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친대만 성향의 다카이치는 지난 1일 미국 허드슨 연구소 기고문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은 일본의 관심사다. 대만은 일본의 극히 중요한 친구”라고 했다. 또 “힘에 따른 현상 변경은 없어야 한다”면서 “중국의 리더와 솔직하게 대화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온 공명당과 연립이 끊어진 이상, 다카이치 내각은 공명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실제로 다카이치 내각과 자민당의 요직엔 친대만 인사들이 대거 자리 잡았다. 내각 서열 2위인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이 대표적이다. 초당파 의원 연맹인 ‘일·화(대만) 의원 간담회’의 사무국장인 기하라 관방장관은 이달 초 대만을 방문하려다,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할까 우려해 마지막에 포기했다.
자민당 당 4역인 고바야시 다카유키 정조회장과 후루야 게이지 선거대책위원장은 각각 올 6월과 10월에 대만을 방문했다. 후루야 선거대책위원장은 올 3월 “대만의 유사(有事, 전쟁 등 비상사태)는 일본의 유사”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과거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했던 발언으로, 중국의 대만 침공은 곧 일본의 참전을 부를 것이란 경고다. 옛 아베파 소속으로, ‘리틀 아베’로 불리는 하기우다 고이치 의원도 정조회장 대행으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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