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7월 취임 후 본지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갖고 국내 석학들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한국판 원사(院士) 제도(가칭)’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중국 정부가 최고 과학자에게 부여하는 원사 제도를 벤치마킹해, 업적이 뛰어난 원로 과학기술인들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오는 24일 취임 100일을 맞는 배 부총리는 지난 17일 정부서울청사 부총리실에서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인재 유출을 막는 방안을 담은 패키지 제도를 곧 내놓겠다”고 했다.
그는 또 사회 전반에 걸친 인공지능(AI) 및 과학·통신 기술 발전을 위해선 ‘안 되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허용’하는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negative regulation)’ 원칙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허가한 것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제’의 반대 개념이다. 국가 안보나 국민 생명·안전을 위협하는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면 허용하는 방식으로 과학기술 규제를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배 부총리는 “이재명 대통령께서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국가는 흥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망했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과학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대변혁을 이루지 못하면 선진국 대열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래는 배 부총리와의 일문일답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달 말 부총리급으로 승격했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통합으로 과기부총리가 폐지된 지 17년 만이다.
“대통령께서 국무회의 때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여긴 나라는 흥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망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가 과학기술이나 AI 분야에 투자해 5~6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선진국 대열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 과학 혁신을 통해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과기정통부를 부총리급 부서로 승격한 것도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일 거다. 과기정통부가 나라 경제를 살리는 특공대 역할을 해야 한다.” 힘주어 말하는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LG AI연구원장으로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 ‘엑사원’을 개발하다 지난 6월 장관직에 내정됐다.
“처음엔 선뜻 수락하긴 쉽지 않았다. 나는 기업에서도 AI 연구·개발에 파묻혀 있던 사람이고, 그 이외의 세상, 가령 정부 정책을 다룬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선 별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한국도 세계적 수준의 AI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늘 믿어왔고, 이를 세계 곳곳에 서비스하고 더 널리 확산시키는 것을 항상 꿈꿔왔는데, 이를 위한 근본적 경쟁력을 갖추려면 정부 차원의 넓은 데이터 투자나 GPU 확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기업과 학계의 역량을 총합해 기존 기술 개발을 뛰어넘는 성과를 내고, 이를 통해 AI 산업 생태계를 완성하는 일은 내가 그래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장관직을) 맡게 됐다.”
-취임 50일 기자 간담회 때 ‘2030년까지 우리나라를 AI 3대 강국으로 올려 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불가능한 꿈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범정부 차원에서 기업과 학계에 미국·중국만큼 큰 판을 깔아준다면, 글로벌 톱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한 번도 ‘그만큼’ 주고 하라고 한 적이 없어 ‘그만큼’의 성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업에서 일할 때도 이런 부분들이 답답해 과기정통부 간담회에서 ‘내가 한 달 만에 추론 모델 제대로 만들어낼 테니, 정부 차원에서 투자 좀 제대로 해달라’고 말한 적도 있다. 미국 오픈AI가 앞장서 달릴 수 있는 것도 CEO인 샘 올트먼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한 결과다. 우리도 그 정도 베팅한다면 지금껏 없던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 범부처 AI 예산이 3조3000억원에서 10조1000억원으로 늘었다.
“늘었지만 아직 충분하진 않다. 멈추지 않고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 R&D 분야에서만큼은 범정부 차원에서 ‘우린 안 돼’ ‘왜 이리 많이 투자하나’ 같은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조선·방산·에너지·바이오 같은 분야까지 AI 혁신을 이루려면 각종 규제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수다.
“대통령께서 최근 ‘규제 합리화 TF’ 회의에서 AI 대전환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네거티브 규제’ 원칙을 도입하자고 하셨다. 국가 안보나 국민 생명을 위협하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규제를 다 풀겠다는 뜻이다. 정부에 허가받은 것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제’와 반대다. AI 데이터 활용, 클라우드 도입, 바이오 연구에서도 규제가 획기적으로 풀릴 수 있다.”
-AI 대전환을 이루려면 전력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전력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아시아·태평양의 ‘AI 인프라 허브’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전력 이슈는 해결하고 넘어갈 부분이 맞다. 재생에너지로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기정통부에선 현재 비경수로형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개발 시간을 앞당기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인재, 석학들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대책도 시급하다.
“중국의 원사 제도를 벤치마킹한 ‘석학 지원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출연 연구소, 대학이 정년을 맞은 석학 중 대상자를 선정하면 국가가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한다. 비전임 교원을 포함한 청년 연구자에 대한 안정적 연구비 지원 등도 같이 구상해 11월 초 발표하겠다.”
-올해 일본이 노벨 생리의학상·화학상에서 수상자 2명을 배출했다.
“노벨상 수상을 앞당길 비결도 AI 혁신을 통해 찾을 수 있다. AI를 활용하면 속도와 질이 비약적으로 달라진다. 정부가 이를 달성할 수 있도록 빠르게 AX 기반을 완성해 주고, 기초과학에 지속 투자한다면 일본과의 격차도 좁힐 수 있다고 본다.”
-최근 통신사 해킹 사고가 잇따랐다.
“해킹 정황을 확보할 경우 기업의 신고 없이도 정부가 현장 조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해킹 사고 예방·대응에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민간 플랫폼 사업자, 통신사들과 이야기 나누며 근본적 대책을 세우겠다.”
-임기 동안 반드시 이루고 나가고 싶은 것 하나를 꼽는다면.
“과학기술, AI에 대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확보하고, 국가/민간의 투자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 앞으로 과학기술, AI 분야에서 만큼은 ‘안 돼’ ‘못 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역적이 되는 분위기까지 만들어 놓고 나가고 싶다(웃음). K컬처 열풍처럼 과학기술, AI 분야에서도 ‘메이드 인 한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만들 수 있도록 빠르게 돌파하겠다. 이번 정권 안에 성공사례를 만들겠다.”
☞원사(院士)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이 과학·공학 분야에서 각각 선출하는 최고 수준의 학술회원. 중국 과학기술계의 가장 권위 있는 명예직이자, 국가 중대 과제 자문과 학술 방향 제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중국인과 비중국인을 합해 2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경훈
1976년 서울 출생. 광운대 전자공학 학사·석사·박사를 마치고 미국 컬럼비아 서던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SK텔레콤 미래기술원 부장을 거쳐 LG유플러스 AI플랫폼 담당 등을 역임한 국내 대표 AI 전문가다. 2020년엔 LG AI연구원장으로 부임, 한국형 거대언어모델(LLM) ‘엑사원’ 개발을 주도했다. 2023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24년 대통령직속 국가인공지능위원회 민간위원, 2025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을 지냈다.